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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읽기』

by silvertogold100 2025.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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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제목을 이해하면 내용의 절반을 이해할 수 있는 책. **
이성 중심주의 세계관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선보인 현대 철학의 신호탄
쇼펜하우어는 이성주의 철학의 완성자로 여겨지는 헤겔과 동시대를 살면서 그 이성주의 철학에 반하는 반합리주의 철학의 기치를 올린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생철학으로 분류되는데, 그가 시작한 생철학은 실존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그 외 현대 철학의 아이디어를 상당 부분 선구적으로 제시했다.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저서는 **반합리적인 철학의 세계관을 상당히 독창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제시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다**.
  철학자들은 대체로 이성을 신뢰한다. 이성이 잘 발달한 사람들이 철학에 관심을 가졌을 터이니 철학자들이 이성을 신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성에 대한 신뢰는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인간의 이성은 총구 앞에서 너무나 무력한 것이었다.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주목받게 된 철학이 실존철학인데 쇼펜하우어는 그 원류에 해당하는 생철학을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한참 전에 선보였다. 생철학자로는 니체가 쇼펜하우어보다 더 유명하지만 사실 쇼펜하우어 없는 니체는 상상할 수도 없다.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극복한 현대 철학은 신체로 관심을 돌렸다. 쇼펜하우어를 반합리주의 철학의 기수라 하는 것은 그가 신체에 대한 논의를 선구적으로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본능적 요소가 지성적 요소보다 우세하다는 주장을 상당히 정교한 이론으로 구축했다. 그는 생물학, 생리학 등의 연구 성과를 반영해서 당시까지는 찾아볼 수 없던, 세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설명을 시도했다.
그래서인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는 정신분석학, 뇌과학의 아이디어와 연결되는 내용이 많이 발견된다.

> 우리는 소유권의 귀속 주체를 분명히 해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기에 인간을 보는 관점이 개체주의를 벗어나기 힘들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개체화의 원리를 극복하여 동고(同苦 ~ 함께 고생하는 것)를 하자고 주장한다.**
늘 개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이 있고, 개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은 연대를 무너뜨린다. **이익을 위해 뭉친 사람들의 응집력은 강고하고, 의미를 위해 뭉친 사람들의 응집력은 약하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이다.**
  개체화의 원리에 사로잡혀 있으면 타인이나 세상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타인은 자기 방식대로 존재하지 내가 원하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엄정한 사실인데도 우리는 이러한 헛된 희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개체화의 원리를 넘어설 때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통해 독자들이 인간이 가지기 쉬운 이 헛된 희망의 실체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주변 사람들을 '인생이라는 고통의 바다를 함께 건너는 '동료'로 볼 수 있게 되는 데 이 책이 보탬이 된다면 해설서를 쓴 사람으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겠다. 2021년 박은미

### 1장 의지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 철학자들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놓고 크게 두 가지 관점 중 하나를 견지한다. **인간을 이성의 존재로 보는 관점과 인간의 이성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관점이다.**
인간을 이성의 존재로 보는 이성 중심 철학은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로 대표된다. 반면에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지 않는 관점의 대표적인 주자로는 헤라클레이토스, 홉스, 흄, 쇼펜하우어, 니체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쇼펜하우어는 반합리주의 철학의 기수로 여겨진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이성은 신뢰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라는 관점을 체계적인 철학으로 내놓았다.
  오래도록 서양 철학자들은 인간은 이성을 통해 무엇이든 알 수 있으며, 인간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이성**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보기에는, **생생한 인간 현실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이성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인간의 현실은 항상 이성의 설명력을 뛰어넘는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경험이었다.**
이성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주류 철학의 흐름과는 달리 그는 세계는 의지로서의 세계이고, 인간은 이 의지로서의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이를 쇼펜하우어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었는데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면서 그가 쓴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나의 이 저서는 하나의 새로운 철학 세계입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것이지요. 기존에 존재하는 옛날 철학을 재탕해 새롭게 서술한 게 아니라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고도로 응축된 사고로 쌓아 올린 책이 될 것입니다"라고 썼다.**

> 이성과 신체를 연결시키지 않는 기존의 철학자들과 달리 쇼펜하우어는 이성은 두뇌에 의해 제한되는 작용으로 의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작용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본질을 이성으로 보는 철학자들은 인간이 이성적 결론에 자기 자신을 종속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보기에는 인간의 행동은 감정에 따라 일어나지, 이성적 결론에 따라 일어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에게 인간은 이성적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에 맞추어 자신을 바꾸는 존재가 아니다. 거꾸로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그 결론이 왜 말이 되는가를 설득하는 데 이성을 사용하는 존재다.** 
🧠왜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신체를 중요시 했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잘은 모르지만 뇌과학적으로 인간은 행동을 선택하기 위해 뇌를 쓴다기보다는 행동을 하고 이 행동을 이러저러한 이유로 했지하는데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인간은 자신이 의욕하는 바를 행하면서 자신이 그렇게 행해야 했던 이유를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드는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위한 뒤 나중에 자신의 행위가 정당했다고 합리화하는 데 이성을 동원하는 존재다.

>이성 때문에 덕 있는 행동을 한다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하고서 사후적으로 이성을 동원해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대는 존재가 인간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에게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힘을 '의지'라 칭했다.** 쇼펜하우어에게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다. 

> 쇼펜하우어가 활동하던 당시에 가장 유명한 철학자는 게오르크 헤겔(Georg Hegel)이었는데 헤겔은 이성철학의 최고봉이자 완성자라고 할 수 있는 철학자이다. 헤겔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이성의 작용에 따른다고 주장했는데, 쇼펜하우어는 '직접적이고 절대적으로 인식하고 직관하며 인지하는 이성'이라는 개념은 허황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인간은 그저 의지가 좌우하는 욕망에 따를 뿐이다. 인간은 지금 인식하는 방식으로만 인식한다. 다른 방식으로는 인식할 능력이 없다. '지금 인식하는 방식으로 인식하는 세계'가 바로 '표상으로서의 세계'이고, 세계 그 자체가 '의지로서의 세계'라는 것만 분명히 해두자.

> 모든 학문은 왜 그런가를 묻는다. 철학(그리스어로 philosophia)의 원래 뜻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니 철학이 곧 학문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물에 관한 철학은 물리학으로, 생명에 관한 철학은 생물학으로 독립하고, 사회에 관한 철학은 사회학으로, 인간의 마음에 관한 철학은 심리학으로 독립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철학이라고 남은 부분은 인생 그 자체에 관한 내용에 국한된다. 그래서 현대의 철학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도 아니고,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도 아닌, '인간의 삶 전반에 관한 학문'으로 국한된 것이다.

> 쇼펜하우어는 이성으로는 삶과 세계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으며, 세계란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고 의지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이성을 통해서는 의지의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는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이성과 의지의 관계를 보는 전통적인 해석을 넘어선다.
**그동안의 철학은 의지를 지성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아 왔지만,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개념을 확장함으로써 의지를 '이성이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보고 이성의 상위에 두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란 모든 만물을 지금 그것으로 존재하게 하는 힘으로, 모든 사물의 내적 원리, 생명의 원리, 생명 에너지, 즉 자연 속의 모든 힘을 말한다. 의지는 항상 사물 속에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한다. 의지는 항상 사물 속에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한다. 그런데 이 의지는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움직인다.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삶의 맹목적인 충동인 의지가 무생물, 식물, 동물, 인간으로 현상한 것이 바로 세계다. 이 중 의지의 성질이 가장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중력이나 자기력 같은 자연력이다. 무기물이나 식물에서 드러나는 힘, 동물을 움직이게 하는 생명력,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의욕과 욕망 등이 모두 의지에 따른 것이다. 

> 여하간 쇼펜하우어는 그러한 삶의 맹목성을 인정하고, 나에게 좋네 나쁘네 따지는 자기 중심성을 탈피하면 남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 맹목성 때문에 힘들어하는 인생의 동지, 이 고통의 바다를 같이 건너야 할 동료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생각했다. 
* 동고 : 독일어 단어 'Mitleid'는 동정, 연민, 동고로 번역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Mitleid로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이 중 가장 아가페적인 것이 동고이기에 동고라는 번역어를 선택했다.

>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쇼펜하우어 철학의 사상적 원천은 플라톤, 칸트, 우파니샤드(Upanishad)다.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에게서는 세계를 현상계(경험하는 세계)와 이데아계로 구분하는 아이디어를, 우파니샤드에서는 이 현상계가 마야의 세계, 즉 가상에 불과하다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철학은 쇼펜하우어 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이 칸트 철학을 수정해서 완성하는 철학이라고 생각했다.
  쇼펜하우어의 독특한 철학이 주목받기 시작한 이후 당대의 많은 지식인이 그의 철학에 매료되었다. 키르케고르, 바그너,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베케트, 아이슈타인, 토마스 만, 카프카, 헤르만 헤세 등이 쇼펜하우어를 숭배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쇼펜하우어를 천재라 칭한 빌헬름 바그너(Wilhem Wagner, 1813~1883)는 <<의지와 표상의로서의 세계>>의 영향을 받아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구상했다고 전해진다.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 1828~1910)의 서재에는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는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헤르만 헤세(Herman Hesse, 1877~1962)도 쇼펜하우어를 통해 동양 철학을 접하고 이러한 사상을 데미안과 싯다르타에 담았다고 한다.
🙋‍♂️🧠📚 근래에 재밌게 읽었던 안나 카레니나, 데미안, 싯다르타와 같은 책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정말 신기했다. 어쩌다 쇼펜하우어를 알게 되어 이 책을 정독 중인데 내 관심사와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어느정도 결을 같이 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 가장 강력한 충격을 표현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책을 고서점에서 만난 후 충격에 사로잡혀 두 주 동안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새벽 2시에 잠들 때까지 <<의지와 표상의로서의 세계>>만 붙잡고 있었는데, 전부 다 읽은 후에는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또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는 무의식 개념을 가능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니체 역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를 두고 '쇼펜하우어의 진정한 아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살려는 의지 안에서 구현되는 에너지들이 근본적으로 성적이라고 생각한 최초의 사상가에 해당한다.
  쇼펜하우어 스스로 매우 오랜 세월 동안 분석되기 어려웠던 자아 혹은 영혼이라 불리는 것을 자신이 의지와 지성으로 분해함으로써 철학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자평한다.

> 쇼펜하우어 철학에서는 칸트가 모든 덕의 근원으로 여기며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이성 역시 의지의 영향을 받을수밖에 없는 것으로 해석된다. 칸트의 이성은 윤리적인 행위를 가능케 하는 덕의 근원이지만,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이성은 선의와 협력할 수도 있지만 악의와 협력할 수도 있는, 의지의 지배를 받는 그 무엇일 뿐이다.
즉, 칸트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면 덕이 있게 행동하게 된다고 생각한 반면 쇼펜하우어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덕이 있게 행동하는 것은 별개라고 보았다. 
  도덕에 대한 입장도 칸트와 상반된다. 칸트는 이성을 가진 인간은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정언명령을 부과하고 정언명령에 따라 행위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정언명령이란 "자신의 행위 규칙을 보편적 행위 입법의 원리에 타당하도록 하라"는 명령이다. **정언명령은 결국 보편적인 행위가 될 수 있는 행위를 하라는 명령이다. 즉 당신이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가 도덕적인지 도덕적이지 않은지를 구분하려면 그 행위가 보편적인 행위가 되어도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모든 사람이 해도 된다고 여겨지는 행위가 도덕적 행위라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이 스스로를 정언명령에 구속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마치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도덕적이지 않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모두가 길에 쓰레기를 버리게 된다면 길에 악취가 나고 벌레가 들끓으며 갈 수 있는 길이 없게 될 것이기에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언명령에 구속된다는 것이겠다.
  칸트가 최고선을 향한 무한한 전진을 주장한다면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완전한 부정과 폐기를 주장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주장하는 **정언명령은 동기를 줄 수는 있는데, 그 동기는 의지가 발현되는 방식은 바꿀 수 있지만 의지 자체는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도덕이나 추상적 인식은 진정한 덕을 낳을 수 없다고 보았다. **진정한 덕은 타인에게도 자신에게서와 같은 본질을 인식하는 직각적인(intuitive) 인식에서 생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직각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어떠한 인식도 개입시키지 않고 그냥 바로 안다는 것이다.** 직관이라고 할 때보다 더 아무 인식도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 의욕은 습득할 수 없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입장이다. 의욕은 의욕이기 때문에 배울 수도 없고 습득할 수도 없다. 의지가 낳은 의욕은 결국 모든 것을 자신(의욕)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의욕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정도를 낮출 수도 있고 그 방법을 세련되게 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의욕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인식을 해야 모든 문제가 풀릴 수 있다.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에 대해 개인들은 자신들의 호불호에 따라 기쁨이니 고통이니 낙인을 찍지만 의지는 아무 이유 없이 움직일 뿐이다.** 파도가 오고 가듯이 삶의 일들은 무심히 일어나는데 인간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의지의 움직임에 희로애락을 겪느라 고통스럽다. 그러나 의지의 움직임에서 자유로운 인간의 없다는 점에서 의지의 움직임은 공평하다. 이러한 의지의 움직임의 이유없음을 직시할 때 의지로 인한 고통을 그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도 사상과 불교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서양 철학자 중에서 불교 경전을 체계적으로 접한 최초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결론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과 아주 유사하다. 쇼펜하우어가 죽을 때까지 사용하던 책상 위에는 석가의 입상이 있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고통에서 시작해 해탈로 끝난다는 평가는 적절하다. 

> 쇼펜하우어는 경험과학의 성과를 수용하면서도 과학주의에 빠지는 것은 경계했다. 과학의 경험적 성과는 수용하면서도 과학의 논리를 반성적으로 분석하여 그 한계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쇼펜하우어에게 신체는 우리에게 의지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그 무엇이다. 쇼펜하우어는 생식기가 의지의 본래적인 초점이라고 하면서, **생식기는 신체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 훨씬 더 의지에만 종속되고 인식에는 전혀 종속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생식기는 인간의 신체에서 가장 생각으로 조절되지 않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개체화의 원리를 극복하고 동고를 하자는 주장은 고통받는 인간이 남과 더불어 살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맹목적인 의지의 움직임을 보며 의지 자체가 헛되다는 것을 인식할 때 쇼펜하우어는 이를 '의지의 불꽃이 꺼진다'라고 표현한다.** 자신을 구성하는 에너지를 알고, 즉 의지가 세계를 구성함을 알고 의지가 모든 고통과 죽음을 산출하는 것을 관조한다. 관조를 통해 세계에 매혹당하지 않기에 중도와 초연함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 물론 이 말이 '무조건 이해하자'거나 '정신승리를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고통을 두고 그것을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와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 그 고통의 정도가 다름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의지의 맹목성을 깨닫지 못하면 고통을 받게 된다. 의지의 내적인 충돌을 인식하고 의지의 본질적인 헛됨을 인식하는 것을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진정제라 한다.**
결국 이 두 가지 인식이 의지의 진정제로 작용하는 것인데, **이 인식은 고통으로 인해 가능해진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고통은 인간을 힘들게 하기는 하지만 사태의 본질을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표상 없이 고통 그 자체만을 인식하면 의지는 진정될 수 있다. 즉 고통에 대해 이 고통은 왜 나에게 오는가 하는 추가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맹목적인 의지로 인한 고통이 있음을 수용하면 고통으로 인해 많이 고통스럽지는 않게 된다.** 이 지점은 불교와 상통한다. 

> 불교에서는 희로애락이 고통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 분노와 슬픔이 고통인 것은 우리 모두가 안다. 그런데 기쁨과 즐거움은 왜 고통인가? **기쁨과 즐거움이 고통인 이유는 우리가 기쁨과 즐거움이 그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이다.** 기쁨과 즐거움 자체가 고통이 아니라 이것이 중단될까 봐 두려워지기 때문에 고통이 된다. **이 말은 거꾸로, 분노와 슬픔에 대해서도 '이것이 중단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덜 고통스러워진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희로애락이 고통인 이유는 분노와 슬픔이 그치기를 바라고 기쁨과 즐거움은 그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쳤으면' 혹은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버리고 순수하게 희로애락을 느끼면 희로애락은 **그저 흘러가는 무엇일 뿐 고통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은 '마야의 베일을 벗은 인식'이고, 쇼펜하우어가 말한 '삶에의 의지 부정'이 바로 이러한 상태이다.

> 우리는 현실에서 성취를 이루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공을 지향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현실에서의 성취는 **진통제에 불과하다.** 삶이라는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진통제 말이다. 
삶에의 의지는 이기주의에 사로잡히게 하는데, 이기주의에 사로잡히면 고통스럽다. 이기주의는 개체화의 원리에 강하게 사로잡힌 상태이다. 개체화의 원리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의지가 개체를 형성하는 원리에 사로잡힌다는 것인데, 이는 결국 나라는 개체에 주목하는 것이고, 나와 너의 구분에 매몰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을 관조하면 나도 너도 결국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의 대행자일 뿐임을 수용하게된다. 
  즉 '나'라는 개체에 매몰되지 않고 '그'라는 개체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도 의지가 그렇게 구현되어 그렇게 살고 나도 의지가 이렇게 구현되어 이렇게 사는 존재인데 결국 너나 나나 모두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에 따라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의 고통이 나와 무관하게 여겨지지 않는 마음, 즉 동고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쇼펜하우어를 통해 고통받는 인간이 남과 더불어 살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유 없이 움직이는 의지의 작용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하기 마련인 인간의 기본 조건을 파악하게 되면, 궁극적으로 이 의지의 맹목성에 휘둘리는 것 자체가 문제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이 의지의 작용에 지나치게 영향받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간수하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단순한 정신 승리에 그치지 않고 의지 자체를 떠나는 길, 그리고 개체화의 원리에 매이지 않고 동고의 마음을 가지는 길에 나서보자

### 2장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읽기
>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표현으로 쇼펜하우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표상으로밖에 세계를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언제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했는가? 우리는 무엇인가를 만지고 느끼면서 자기 자신을 자각한다. 물이라는 신비로운 물질을 만지면서 '물이라는 물질이 존재하고 나는 이 물질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이런 순간이 바로 스스로를 주관으로 발견하는 순간이다.**
  인간은 어떤 소리를 들을 때 좋은지, 어떤 것을 볼 때 힘든지, 어떤 것을 만질 때 싫은지 등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오감에 쾌적한 감각을 제공하는 것은 찾아다니고 불쾌한 감각을 제공하는 것은 멀리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찾으려 하고 멀리하려 하는 자신의 경향성에 따라 행동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경향성 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어렵다.** 이는 마치 눈이 눈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인식 주관은 모든 것을 인식하지만 어느 것에 의해서도 인식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인식주관에 의해 형성된다. 쇼펜하우어는 "주관 없이는 객관이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고통을 느끼는 주체 없이는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를 철학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객체는 주체없이 절대로 표상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객체는 인식되는 대상이고 주체는 인식하는 인간을 말한다. 사물은 그것을 보는 사람이 없으면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니까 "객체가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주체도 이미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인식이다. 인간에게는 '~~에 대한 의식'만 이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능력이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스스로 인식 주체이면서 스스로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능력이 있는 존재다. **인간은 주체이면서 객체일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충분근거율에 입각해 표상하는 인간**
인간이 표상을 할 때 표상의 과정에 작용하는 어떤 원리가 있는데, 그 원리를 '충분근거율'이라고 칭했다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충분근거율에 입각해 대상을 인식한다. 충분근거율은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다. 
  충분근거율이 적용되는 영역은 인식 가능한 영역이고 적용되지 않는 영역은 인식 가능하지 않은 영역이다. 아니 어쩌면 인식 가능한 영역에서 사용되는 인식의 원리가 충분근거율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칸트는 '인간은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는 보장이 없다'고 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칭하는 '물자체'의 영어 표현은 **thing-in-itself**이다. 칸트는 **'인간은 인식할 수 있는 것만 인식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인간이 인식하는 영역을 현상계라고 칭하며, 현상계는 '물자체가 촉발해서 인간이 인식하게 되는 영역'이다. 현상계와 물자체를 일치하는지 일치하지 않는지를 유의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물자체를 모두 인식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은 과학으로 확인된다.
  예를 들어 인간의 가청주파수는 16Hz ~ 20,000Hz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인식 능력이 닿지 않는 영역이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충분근거율도 인식 원리다. 사물이 충분근거율에 입각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충분근거율로 인식하는 것이다. 생긴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보는 방식대로 볼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표상을 형성하는 인식 원리가 근거율이다. 그렇기에 쇼펜하우어는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근거율에 종속되어 있다'고 표현한다. 

> 충분 근거율의 네 가지 뿌리는 존재의 근거율, 생성의 근거율, 인식의 근거율, 행위의 근거율이다. 
  무언가가 왜 일어났는가를 묻는 것은 결국 생성의 근거율을 묻는 것이고, 무언가가 왜 그러한가를 묻는 것은 인식의 근거율을 묻는 것이며, 무언가가 왜 행해지는가르 묻는 것은 행위의 근거율을 묻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배제하고는 존재를 파악할 수 없기에 시간과 공간은 존재의 근거율이다.

> 생성의 근거율은 우리가 경험 속에서 파악하는 대상들의 모든 변화를 설명한다. 이를테면 씨앗이 잎을 산출하고 잎이 꽃을 산출하고 꽃이 열매를 산출하는 과정은 생성의 근거율로 설명될 수 있다. **생성의 근거율에 의해 개념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바로 인과율이다.**

> 철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직관의 형식이라고 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이 있어야 무엇이든 지각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시간과 공간을 직관의 형식이라고 한다. 이 시간과 공간이 바로 존재의 근거율이다.
  쇼펜하우어는 시간과 공간을 '개체화의 원리'로 들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개체화의 원리로 보는 것은 철학에서 통상 인정되는 내용이다. 단순화해서 예를 들면 너와 나의 존재가 다른 것은 너와 내가 같은 시간에 존재하지만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공간이 구분되지도, 시간이 구분되지도 않는다면 너와 나는 동일한 존재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시간과 공간은 각기 독립하여 물질의 전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하나가 되어 물질의 본질을 이룬다"고 말한다. 공간의 규정 없이 시간의 규정만 있거나 시간의 규정 없이 공간의 규정만 있어서는 물질의 작용이 나타날 수 없다. 

> 지성(오성)은 원인과 결과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인데,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게 해주는 출발점이 되는 것은 바로 신체의 감각, 즉 신체의 변화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이다. 신체는 주관적 인식의 출발점이 되는 표상이다. 총명하다는 것은 지성(오성)이 예민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에게는 지성(오성)과 이성이 같이 작동하지만 동물에게는 지성(오성)만 작동하는데, 어떤 경우는 동물의 지성(오성)이 예민하게 작동해 인간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면서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코끼리를 관찰한 경험을 이야기 한다. 다리를 많이 건너본 코끼리 무리가 어느 다리에 이르자 그 다리의 구조가 자기들의 체중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감지해서 그 다리를 건너려 하지 않았다는 사례는 코끼리 지성(오성)의 영리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오랑우탄이 불을 발견하면 그 불을 쬐기는 하지만 그 불에 나뭇가지를 더 넣어 불을 꺼지지 않게 하는 방법은 모른다는 것을 지적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한느 지성(오성)이 없다면 동물들에게 훈련을 시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 세계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다. 이 갈망을 형이상학적인 욕구라 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욕구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세계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철학은 사실 이에 대한 답을 하려고 노력해온 학문이다.
**이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답은 '의지의 작용 때문'이라는 것이다.**

> 충분 근거율인 시간과 공간은 의지가 표상으로 드러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이다. 의지는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비로소 객관화되어 다양한 표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계는 표상이며 이 세계라는 표상은 의지가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의지는 자연의 모든 힘, 세계의 만물을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의지는 아무런 근거나 이유도 없이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힘이다. 의지가 왜 그러한지 묻는다면 '그냥 그렇다'는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세계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인데 그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곧 의지로서의 세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의지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난 세계가 바로 표상의 세계다.
이 세계는 표상의 세계인 동시에 의지의 세계다. 세상 만물은 모두 의지가 우리의 감각 기관이 포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의지가 드러나는 것을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객관화된다'고 표현했다. 객관화된다는 말은 시공간 안에서 구체적인 존재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 철학에서 '객관화된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여 표상으로 포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형식으로 무언가를 포착해야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인간은 표상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의지가 시간과 공간의 형식으로 포착될 때 표상이 성립되고, 인간은 이를 인식할 수 있다. 
  의지는 사물들의 형태로 다양하게 객관화된다. 모든 사물은 의지가 그 자신의 모습을 단계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존재의 다양성은 의지가 객관화되는 정도의 차이에서 나온다. 즉 의지가 객관화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사물은 각기 다른 사물이 된다.

> 쇼펜하우어는 돌보다는 식물이, 식물보다는 동물이 객관화의 정도가 높다고 말한다. 중력과 같은 자연력은 의지의 객관화가 저차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의지가 저차원적으로 객관화되었다는 것은 의지의 성질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지의 성질이 드러나지 않는 무기물이나 자연력은 불분명하고 인식이 없는 충동으로 드러난다. 무기물보다 의지가 조금 더 분명하게 객관화된 것이 식물이다. 식물은 어둡게 충동하는 힘으로 존재한다. 햇빛과 물에 의해 성장을 하면서 어느 부분은 더 잘 자라고 어느 부분은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등의 반응이 있지만, 그 과정이 식물에게 의식되지는 않는다. 동물처럼 어디로 이동을 하겠다든가 하는 인식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의지의 현상만이 근거율에 종속되고 의지 자체는 그렇지 않으므로 (...) 그런 점에서 의지는 '근거가 없다'고 부를 수 있다.` 
  **의지가 근거가 없다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이라는 의미다.** 의지로서의 세계는 이성적으로 설명하거나 포착할 수 없기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어렵게 말하면, **세계는 인식론적 측면에서 보면 표상의 세계인데 존재론적 측면에서 보면 의지의 세계다. 즉 세계는 의지에 의해 구성되지만 그 세계는 인간에게 표상으로 드러난다.** 그러니깐 쇼펜하우어에게 물자체는 의지다. 즉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근원적인 존재는 의지다. 의지의 세계는 그 자체로 경험될 수 없고 의지가 일으킨 표상의 세계로만 경험된다. 한마디로 세계는 의지가 표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신체, 의지를 경험하는 마당**
인간은 외부세계만을 인식하는 존재가 아니고 자신의 고유한 신체성도 경험한다. 신체를 가진 인간은 신체를 바탕으로 세계를 표상으로 경험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신체는 독특하게도 의지와 표상이 교차하는 영역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신체가 그 자체로 의지의 현현이기 때문에 세상을 의지로서도 경험하게 된다. 신체는 의지인 동시에 표상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신체는 곧 '표상화된 의지'라고 말한다.**
  신체는 우리에게 표상으로 드러나지만 그 자체로 의지를 드러내는 매개체이기 때문에 상당히 독특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래서 신체는 세계의 다른 측면인 의지가 가시화되는 매개체가 된다. **신체는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생명의 원리인 의지가 가시화되는 마당인 것이다.** 신체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객관이다. 우리는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그냥 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직접적으로 인식한다고 표현한다. **그리하여 이 세계가 의지로서의 세계인 동시에 표상으로서의 세계임을 알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신체의 부분들은 의지를 실현시키는 주요 욕망과 상응한다. 예를 들어 치아, 목, 장은 굶주림이 객관화된 것이고, 생식기는 성욕이 객관화된 것이다. 신체의 동작은 의지가 객관화된 행위인데 동기에 의해서 생기는 행위든 자극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생기는 운동이든 모두 의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을 차는 모습은 의지가 겉으로 드러나는 자세다. 의지가 신체에 작용해서 드러날 때는 의욕으로 들어난다. 찬다는 의욕이 달성되었을 때에는 쾌감이 생겨나는데 의욕에 반하여 잘못 찼을 때는 불쾌감이 생긴다. 결국 의지로부터 쾌, 불쾌라는 신체적인 자극이 생긴다.
  신체는 나의 의지를 인식하기 위한 조건이다. 신체를 배제한 채로는 의지를 표상할 수조차 없다. 인간은 의지를 전체적, 통일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의지가 자신의 신체에 현상하는 것만을 의식할 수 있는 것이다. 신체 전부는 가시적으로 된 내 의지다. 의지는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자연력 속에 현상하고, 숙고를 거친 인간의 행동 속에서도 현상한다. 의지의 객관화가 고차원적으로 이루어지면 개성이 나타난다. 이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의지가 굉장히 고차원적으로 객관화된 존재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은 생긴 모습으로도 그 개성을 알 수 있는 존재다. 그만큼 의지의 성질이 잘 드러난다.
인간은 의지의 객관화 단계에서 높은 단계에 해당하는 사고 작용까지도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자신의 고유한 행동을 반성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을 반성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드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고통 받는다. 

> 모든 사람은 **선험적으로, 자신의 개별적 행동에서 자신을 전적으로 자유롭다고 간주해 놀랍게도 자신은 매 순간 다른 생활 태도를 시작할 수 있다고, 즉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험적으로는, 즉 경험을 통해서는 자신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필연성에 종속되어 있으며 아무리 결심하고 반성해도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신이 싫어하는 같은 성격을 그대로 가져서, 말하자면 끝까지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자못 놀라워한다는 것**이다.

>**의지에 봉사하는 인식**
뇌는 유기체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다. 이 뇌의 작용인 인식 작용은 의지의 객관화 수위가 좀더 높은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뇌의 작용으로 생기는 표상은 의지에 도움이 되도록 정해져 있다고 말한다. 본질적으로 인식은 의지에 봉사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근거율에 따르는 모든 인식이 의지에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인식은 의지에 도움이 되도록 생겨났고, 그러니까 말하자면 머리가 몸통에서 나왔듯이 의지에서 싹터 나와, 대체로 언제나 의지에 봉사하도록 되어 있다.** 동물의 경우에는 인식의 의지에 대한 이 봉사 정신이 결코 폐기될 수 없다. 인간의 경우네는 (...) 그 폐기가 예외로서만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의지의 작용을 직관할 수 있기 때문에 이념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 그는 의지가 객관화되는 단계 중 최상의 단계에 있는 것을 '이념'이라고 부른다. 쇼펜하우어가 이념이라는 말에 사용한 독일어는 Idee(이데)인데 이는 원래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를 칭한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어떤 것을 그것이게 하는 궁극의 본질이지만, 쇼펜하우어에게 이념은 의지 자체와 다양한 표상들을 연결해주는 무언가다. 쇼펜하우어는 그 용어로 '의지가 가장 고차원적으로 객관화된 것'을 지칭했다. 즉 이념은 의지와 가장 가깝다는 것이고, 의지와 가장 가깝다는 것은 의지의 특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지가 가장 고차원적으로 객관화된 것이 이념이고 그 다음 단계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념을 직관할 힘이 있다. 그렇지만 이데아를 직관하고 이념을 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시간과 공간으로 제약되는 표상에 대한 인식에만 만족하는 인간에게는 이념을 직관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즉 **눈에 보이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에게는 이념을 직관하고자 하는 동기가 없기 때문에 개별 사물들을 사용하는 것에 만족하는 차원에 그친다. ** 당장 눈에 보이는 즐거움을 좇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사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삶은 이념을 파악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의문을 가지고 그것이 왜 그런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자 하는 인간에게만 개별 사물에 대한 인식을 넘어서는 고차원의 인식에 대한 욕구가 있다.** 
  그런데 이념은 개념적 인식이 아니라 직관적 인식을 통해서만 파악된다. 이념은 추론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느낄수만 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이념은 표상의 세계와 의지의 세계 사이에 놓여 있다. 그래서 이념의 파악은 의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념에 대한 인식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 단계의 인식이다. 인과율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이념을 직관할 수 없다. 개별적 사물에 대한 평범한 인식으로부터 이념의 인식으로 이행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이는 예외적으로만 고찰할 수 있다. 이 일은 갑자기 일어난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이념은 의지의 작용에 의해서 드러나는 결과물이 아니라 의지의 직접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충분근거율에 제약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개체 자체는 개별적 사물만 인식하고 순수한 인식 주관은 이념만을 인식한다고 말한다. **이념에 대한 직관은 인과율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순수한 주관에게 가능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고통이 없고 시간을 초월한 순수한 인식 주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순수한 인식 주관은 의지가 없기에 의지의 맹목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념을 관조한다는 것은 특별하고 예외적인 소수의 인간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추상적인 사유, 이성의 개념, 의식에 사로잡히게 하지 않고, 이 모든 것 대신 자기 정신의 온 힘을 직관에 바쳐, 풍경, 나무, 암석, 건물이나 그 외의 무엇이라 할지라도 바로 현재의 자연적인 대상을 조용히 정관함으로써 전적으로 이 직관에 침잠하여 의식 전체를 채운다고 하자. 이때 사람들은 이 대상에 빠져들어(sichverlieren), 즉 자신의 개체, 자신의 의지를 잊고 단지 순수한 주관으로서 객관을 비추는 맑은 거울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인식되는 것은 더 이상 개별적 사물 그 자체가 아닌 이념이고 영원한 형식이며, 이 단계에서의 의지의 직접적인 객관성이다. 이렇게 직관하는 사람은 더 이상 개체가 아닌, 의지와 고통이 없고 시간을 초월한 순수한 인식 주관이다.


> 동양권의 '무아(無我)'라는 개념이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이 상태와 가장 유사하다고 하겠다. 인간은 자신을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까지 의지에 영향 받지 않을 때에야 이념을 관조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념을 인식하는 방법으로 예술을 들고 있다. 이념을 직관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표상 세계에만 집착하는 우리의 시선을 의지 세계로 이끄는 계기를 제공한다.** 예술은 사물의 고유한 내적 본질에로 침잠해 들어가는 행위다. 예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자기 자신에 속박되지 않고 육체의 구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일시적이나마 준다. 예술이 우리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 바로 이념을 직관하는 것과 연관된다.
예술가들은 이념을 인식하고 자신이 인식한 이념을 전달하기 위해 예술 작품을 창조한다. 예술가들은 일반인들이 보지 못한 무언가를 보고 그것을 일반인에게 전달해준다. 예술가가 직관한 이념을 함께 직관할 때 우리는 예술 작품에서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가 감상자로서 예술 작품을 통해 받은 감흥을 타인에게 전달하기는 어렵다. 이는 설명해준다고 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자신이 직관한 이념을 예술 작품에 구현해놓는 사람이 천재다. **천재는 천재가 아닌 사람들도 이념에 대한 직관을 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천재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통찰해서 전달한다. 평범한 사람은 의욕을 개입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바라보는 정관을 지속적으로 할 능력이 없고, 인생 자체에 대한 고찰에 시간을 쓰지 않는다. 이에 반해 천재는 인생 자체를 고찰하는 데 시간을 보내며, 모든 사물의 이념을 고찰하려고 노력한다. **천재는 인생 자체를 고찰하느라 실생활에 매우 서트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길'에 대한 고찰을 소홀히 한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천재는 직관적 인식을 지향하기 때문에 격한 정동과 비이성적 열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이 아마도 천재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해되기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
  천재는 의욕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인식 작용, 즉 순수한 인식 작용을 한다. 의욕에 의해 움직이는 평범한 사람은 자신의 길을 모색하는 데 유능하지만 천재들은 이념을 보는 것을 중시하기에 그렇지 않다. 쇼펜하우어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의 인식 능력이 자신의 길을 비추어주는 등불인 반면, 천재에게는 그의 인식 능력이 세상을 환히 밝히는 태양**이라고 말한다. 천재의 인식 또는 이념의 인식은 근거율에 따르지 않는다. 이에 반해 근거율에 따르는 인식은 실생활에서 현명하고 분별 있게 행동하게 하여 여러 학문을 성립시킨다.

> 인간이 법칙을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여 정립해놓은 이론 체계를 '학문'이라고 한다. 학문은 모든 개별적인 사건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탐구한다. 그러나 학문이 만들어놓은 법칙은 절대적, 보편적 법칙이 되지는 못한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학문은 표상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그 표상들이 근거하고 있는 이념에 대한 인식을 얻으려고 노력하는데 이는 부질없는 짓이다. 즉 표상의 세계의 근거는 의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의지를 직관하지 않고는 이념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의지의 세계는 근거율에 제약되지 않기 때문에 학문의 방법으로는 포착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술은 의지의 다양하면서도 통일된 모습을 직관한다. 즉 의지에 대한 관조적 인식을 한다.**
  이러한 의지에 대한 관조, 이념의 조망은 천재에게 가능하다. 천재는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표상들의 원형이 되는 이념을 직시할 수 있는 성찰의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천재의 삶은 표상의 세계를 넘어서 있다. 표상에 매여 있으면 이념을 직시할 수 없다. 천재는 천재가 아닌 사람들도 이념에 대한 직관을 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눈을 통해 우리에게 현실을 들여다보게 한다. 예술가가 우리에게도 이 재능을 빌려주어 자신의 눈을 우리에게 달아줄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 이것은 획득된 것이고 예술의 기교적인 것이다. 
`천재성이란 (...) 원래 의지에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인식을 이 봉사로부터 떼어놓는 능력, 즉 자신의 관심, 의욕, 목적은 전혀 안중에 두지 않고 그에 따라 한순간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순수한 인식의 주관으로서 세계의 명백한 눈으로 남는 능력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지에 대한 봉사'라는 표현은 의지에 영향을 받아 의지가 객관화되는 데 일조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내 몸을 통해 덥지 않고자 하는 의욕을 느끼고, 그에 따라 시원한 것을 찾아가는 것도 의지에 대한 봉사다. 내 몸에 체현된 의지의 요구에 맞추어 나는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세계의 본질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이러한 의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의지의 객관화가 이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갈등 속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나는 내 방식대로 존재하고 그 사람은 그 사람 방식대로 존재할 뿐인데, 나는 그로 인하여 그는 나로 인하여 불편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불편을 주는 상대방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곤 하지만, 그 사람은 내가 불편한지조차 의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고통 없이 살고 싶어 하지만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그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이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저는 절대 화장실은 가고 싶지 않아요"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음식을 먹는 쾌락을 누리면 화장실에 가야 하는 고통은 피할 수 없다. 

>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아무리 법칙적이고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본능적이고 맹목적인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일 뿐이다. 인간은 **의지가 체현된 자신의 육체를 통해서 이 의지의 소용돌이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사는 한 그 소용돌이를 피할 방법은 없다.**
의지에 따른 의욕은 특정한 시점에는 만족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그 만족은 일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모든 의욕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에야 인간은 갈망에 시달리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만족감을 미적 만족감이라고 했는데, 미적 만족감은 예술과 자연에서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자연이 주는 편안함을 누려보지 못한 인간은 없다. 자연은 인간을 치유한다. 그러나 이렇게 별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순간적인 일이다. **자연이 주는 편안함이나 예술 작품이 주는 치유의 효과는 일시적이다.**

>**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 마야의 베일**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인식을 하려면 "모든 삶에는 지속적인 고뇌가 본질적임을 인식"해야 한다. 지속적인 고뇌가 없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면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의식을 할 수 없다. 
  쇼펜하우어는 '근거율에 맡겨진 인식'이 바로 인도인들이 말하는 '마야의 직물'이라고 말한다. 마야(Maja)는 힌두 철학의 근본 개념이다. 산스크리트어로 '환상'이라는 뜻이다. 힌두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바로 '마야'다. **쇼펜하우어는 3절에서 "마야는 인간의 눈을 가리고 세계를 보게 하는 기만의 베일"이라는 말을 인용한다. **
  
> **의지가 의욕하는 것은 언제나 삶이다. **그런데 개체 입장에서는 자신을 통해 의지가 객관화되는 과정이 중단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연은 끊임없이 개체를 저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 그 자체이고 더구나 자연의 자기 의식의 최고 단계에 있지만 자연은 삶에의 의지의 객관화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입장을 파악하여 거기에 머물면, 그 자신인 자연의 불멸의 생명을 되돌아봄으로써, 물론 또 당연하게도 자신과 자기 친구의 죽음에 대해 위안을 얻을지도 모른다.**
**인간 스스로 자신이 의지가 객관화된 존재임을 알고 자신의 생명 역시 의지의 일부에 속한다는 것을 알면 죽음에 대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고 있지만 이 사실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스스로 세계 자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한다. 인간은 가장 내적인 의식에서 스스로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이 존재의 중단에 대해 의식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생명체가 자신의 존재가 중단된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모두 죽음은 늘 타인의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개체는 삶에의 의지 자체가 개별적으로 객관화된 것이므로, 개체의 본질 전체는 죽음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 인간은 이렇게 행위 당사자에게도 드러나지 않는 동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데도 스스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기에 머리가 아프다. **결국은 동기에 따른 선택을 할 것인데도 그 동기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로 어떤 선택이 자신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를 고려해볼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숙고 능력이 인간의 현존을 동물의 현존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인간은 '동기들이 충돌하는 싸움터'다. 
  물론 인간의 행동 방식이 눈에 띄게 변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격이 변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성격이 발현되는 방식이 다소 바뀐 것일 뿐이다. 의지가 변함없이 추구하는 것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추구하게 할 수는 있어도 의지 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외부의 영향이 의지가 지금까지 의욕해온 것과 실제로 다른 것을 의욕하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에게 **의욕을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의욕이 먼저고 인식은 나중이다. 스스로가 의욕하는 것을 나중에 인식하는 것일 뿐이다.
  의지 자체는 변화하지 않아도 인식이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쳐 성격이 변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성격이 전개되어 여러가지 특색이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은 자신을 추동하는 동기를 인식하게 된다. **의지와 동기의 연관관계는 인식할 수 없지만 자신을 움직이는 동기는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을 움직이는 동기를 잘 인식하는 사람도 있고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을 움직이는 동기를 잘 인식하는 사람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관찰적 자아가 잘 발달한 사람이다.** 자신을 움직이는 동기를 잘 인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동기에 따라 움직이기에만 바쁘지 동기 자체를 인식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 자신과 실제 자기 자신이 매우 다를 수 있다. **자신을 움직이는 동기를 잘 인식하는 삶은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 자신과 실제 자기 자신이 일치하지만, 자신을 움직이는 동기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 자신과 실제 자기 자신이 다르다.**

>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성격을 예지적 성격과 경험적 성격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예지적 성격은 나라는 개체에 객관화된 의지의 경향이다.** 인간은 의지에 따라 행위하지만 의지의 내용은 모른 채 행위한다. **경험적 성격은 의지에 따라 내가 의식하지 못한 채 행위하면서 파악하게 되는 나의 성격이다.** 나 자신이 나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어떤 행동을 하게 되고 그러한 일련의 행동을 하게 되는 자신의 경향성을 의식하게 될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러한 자기 자신의 경향성을 의식하게 되어서 자신을 잘 파악할 수 있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 자신의 경향성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즉물적으로 일어나는 세상사에 반응하며 살아가기 바쁜 사람이다.**

>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에 영향을 끼친 쇼펜하우어**
지성(오성)은 동기를 파악할 수는 있지만 의지 자체가 어떠한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한다. 의지는 그렇게 직접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의지'가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의 원형이 되었다. 쇼펜하우어에게 **인식은 오히려 의지의 도구다.** 의지가 필요로 하면 인식이 이루어지고 의지가 필요로 하지 않으면 인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지는 근원적인 것이고 인식은 의지가 현실화되는 데 필요한 일을 하는 의지의 현상인 것이다.** ~ 이는 무의식이 의식화되기도 하고 의식화되지 않기도 하는 것과 유사하다. 프로이트 자신도 쇼펜하우어에게 영향을 받았음을 스스로 인정한 바 있다. 

>`우리의 행위는 언제나 우리의 예지적 성격에 따라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운명을 미리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지적 성격을 선험적으로 통찰할 수 없고 경험에 의해 다른 사람들을 아는 것처럼 후험적으로 알 뿐이다.`
"예지적 성격을 선험적으로 통찰할 수 없다"는 것은 성격을 미리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지성(오성)은 의지의 결정을 후험적이고 경험적으로 비로소 알게 된다'는 말은 인간이 스스로 행위를 하면서 자신을 움직여가는 의지의 결정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예지적 성격은 그 자체로 파악되지 않고, 예지적 성격에 따른 행위의 축적을 보며 스스로의 경향성을 사후적으로 의식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우리가 왜 자기 자신을 파악하지 못하는지를 아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자신을 타인처럼 관찰할 수 없기에 작기가 자신을 가장 잘 모를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의욕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 '나 자신이 이러이러한 존재다'라고 미리 파악할 수는 없다. 행위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행위 이후에야 어슴푸레 파악할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너답다"라고 말하면 "나다운게 뭔데?"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타자들이 나에게 공통적으로 느끼는 그 느낌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적으로 의욕의 지시를 받고 있어서 순수하게 지성적인 향유를 누릴 수 없다. 순수한 인식 작용에 들어 있는 기쁨을 맛볼 능력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실존철학에서 '현존재'라 칭하는 사람들도 의욕의 지시에만 따르는 사람들이다. **의욕을 어떻게 실현하고 욕망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충족감이나 만족감을 가지기 어렵다. 이에 비해 자기 자신을 문제시하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존재가 실존이다.**
🏃‍♂️🏃‍♀️🙋‍♂️ 자신의 현 상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그 상태의 한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고자 한다면 그게 바로 실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쇼펜하우어는 인생행로가 일직선일 수 없다고 하면서 "떨면서 고르지 않은 선을 그으며 흔들리고 회피하고 되돌아가며 우회하고 고통을 맛본다"고 말한다.
`본래 즐거움은 자기의 힘을 사용하고 느끼는 것외에는 있을 수 없고, 가장 큰 고통은 자기에게 필요한 힘의 부족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강점과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 규명하면 우리는 우리의 현저한 자연스러운 소질을 키우고 사용하며 온갖 방식으로 이것을 이용하려고 해서 언제나 이것들이 유용하게 적용되는 곳으로 방향을 돌리겠지만, 우리의 소질에 원래 부적합한 노려근 전적으로 또 자기극복으로 피할 것이다. 즉 우리가 성공하지 못할 것은 시도하지 않도록 유의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데 도달한 사람만이 언제나 완전히 분별 있게 전적으로 그 자신이 될 것이다. (...) 그런 다음 그는 종종 자신의 강점을 느끼는 기쁨을 맛볼 것이고, 자신의 약점을 떠올리는 고통은 좀처럼 맛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알게 되면 자연적인 소질을 키울 수 있게 되고 또한 소질에 부적합한 노력은 하지 않으려 노력하게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그럴 때 완전히 분별있게 전적으로 그 자신이 된다고 표현한다. 자신의 경향성을 인식하고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잘 알기 때문에 그 약점이 활성화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또 새삼스럽게 자신의 약점 때문에 다시 절망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약화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기대해도 되는 것과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서 중요한 일이다.** 만약 사과가 '왜 나는 오렌지가 아닌가'를 두고 고민한다고 생각해보자. 사과가 '나는 왜 빨갛지? 주황색이고 싶은데!'라든가 '달지만 시고 싶다' 같은 소망에 시달린다면 여러분은 사과더러 뭐라고 하고 싶은가? 
  자신은 의지의 현상이기 때문에 다른 자기 자신을 의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말을 쉽게 하자면 '인간은 생긴 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될 수 있겠다. 물론 생긴 것이 발현되는 내용은 조금 바뀔 수는 있지만 말이다. 의욕은 나에게 구현된 의지의 현상이기에 의도할 수도 배울 수도 없다. 그래서 쇼펜하우어가 '의지가 의지 자신과 직접 모순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해 안다는 것은 이 세상의 가장 큰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고통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고통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은 "자기의 개성에 대한 무지, 그릇된 자부심, 그리고 거기에서 생기는 불손함의 불가피한 결과"다.**
  
> 나는 나임을 벗어날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나 자신을 전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습득된 성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자기 인식에 입각하여 자신에게 가능성으로 주어진 자신의 특정한 성격을 계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습득된 성격은 나에게 구현된 의지의 범위 내에서 스스로 일궈낸 성격이다. 습득된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만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경향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는 그 경향성을 인식하고 조절하기도 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의지 자체는 변화하지 않아도 인식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크기에 어느 정도의 변화는 이룰 수 있다.

> **의지의 움직임은 고통이 된다.**
의지가 끊임없이 뻗어나가기 때문에 행복도 잠정적이고 고통도 잠정적이다. 의지가 있는 한 고통은 피할 수 없는데, 인간은 의지의 구현체이니 인간이 고통을 겪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런데 **의지의 잠정적인 목표가 충족되어 만족을 느끼게 되면 인간은 또 권태를 느끼게 된다.** 그러니 **인간의 삶은 "시계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곤궁과 근심을 면한 거의 모든 사람은 드디어 다른 모든 짐을 벗어던지고 나면, 이번에는 그 자신이 짐이 된다고 쇼펜하우어는 표현한다. 
  예를 들어 종일 아무 일이 없을 때에는 열심히 일하다가 잠시 쉴 때 느끼는 꿀맛 같은 휴식을 느끼지 못한다. 여가도 마찬가지로 백수에게는 일과 여가의 구분이 없고, 그리하여 놀이가 놀이로서의 의미를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삶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을 열심히 해야 노는 것도 재미있어진다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라도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한다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경우에도 그 하고 싶은 일이 무조건 내가 좋아하는 일로만 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 더군다나 아무리 하고 싶은 것이라도 계속하면 하기 싫어진다는 것, 그러므로 인생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느끼는 행복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
`행복은 지속적인 충족이나 행복하게 하는 것일 수 없고, 언제나 고통이나 부족으로부터 구원되는 것에 불과하다.`
  이제 행복의 비밀이 밝혀졌다. 행복은 고통을 그 이면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 행복이 있으려면 필연코 고통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삶의 비밀이다. 그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고뇌가 삶에 본질적이라는 인식을 쇼펜하우어는 "쓰디쓴 약에 비유할 수 있는 인식"이라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약에 비유하며 이 인식이 필요한 인식임을 강조한다. **고뇌가 삶에 본질적이라는 것은 반드시 직면해야 할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진실을 자꾸 회피하다 보면 자신의 삶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고통의 원인을 다른 것에서 찾으려 하게 된다. **행복과 고통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삶의 비의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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