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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마음 - 조너선 하이트

by silvertogold100 2025.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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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 "제발, 우리 사이좋게 지내요"
"우린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잖아요?" 로드니 킹(Rodney King)의 이 간곡한 호소가 유명해진 것은 1992년 5월 1일, 흑인인 그가 로스앤젤레스의 경관 네 명에게서 거의 죽을 지경으로 구타를 당하고 약 1년 뒤의 일이었다.
이 책에서의 내 바람은 여러분과 함께 여행을 하는 것, 즉 도덕심리학의 관점을 가지고 인간의 본성과 그 역사를 한 바퀴 죽 둘러보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여러분이 두 가지 주제에 대해 새로운 생각의 틀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두 가지 주제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골치 아프며 가장 편이 갈리는 문제인 정치와 종교를 말한다. 사회생활 에티켓 책에서는 서로 예의를 지켜야할 때는 정치와 종교에 관한 화제는 피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그 둘을 가지고 서슴없이 이야기를 나누라는 입장이다. 정치와 종교는 둘 다 우리 기저에 자리 잡은 도덕적 심리의 표현인바, 그러한 심리에 대한 이해는 오히려 사람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와 종교로 인해 일어나는 그 모든 과열, 분노, 편 가르기를 어느 정도 가라앉히고, 그 자리를 경외심, 놀라움, 호기심으로 채우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표이다.

> 우리 인간이 혈연으로 엮이지 않고도 남들과 대규모의 협동적 집단, 부족, 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다 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덕분이다. 그러나 이 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협동적 집단 사이에 늘 도덕을 내세운 갈등이 끊이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도덕심리학의 세 가지 원칙**
1부에서 소개하는 첫 번째 원칙은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다음이다"라는 것이다. 도덕적 직관은 자동적으로, 그리고 거의 일순에 떠오른다. 도덕적 직관은 도덕적 추론보다도 훨씬 앞서 일어나며, 차후에 일어나는 추론도 처음의 이 직관이 이끌어가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도덕적 추론이야말로 진리에 다다르는 수단이라고 여기면, 매번 낙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그들이 너무도 어리석고, 편견에 가득 차고, 비논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적 추론을 이와 달리 생각하면, 즉 인간이 자신의 사회적 의제를 관철시키기 위해(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자신이 속한 팀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좀 더 현실에 수긍할 수 있게 된다. 직관에서 늘 눈을 떼지 말라. **그리고 도덕적 추론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도덕적 추론이란 대체로 그때그때 맞춰 만들어지는 사후 구성물로, 하나 이상의 전략적 목적을 염두에 두고 치밀하게 만들어진다.**
  2부에서는 도덕심리학의 두 번째 원칙, "도덕성은 단순히 피해와 공평성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2부의 네 장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비유는, 바른 마음은 마치 여섯 가지 미각 수용체를 가진 혀와 같다는 것이다.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지향하는 비종교적인 도덕성은 이 여섯 가지 수용체 중 단 두 가지 수용체밖에 자극하지 못하는 요리와도 같다. 즉, 그것은 희생자들이 당하는 피해와 고통, 혹은 공평성과 불의의 가치만 염두에 둔다. 사실 사람들은 그 외에도 자유, 충성, 권위, 고귀함 등의 가치와 관련해 강력한 도덕적 직관을 가지는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도덕심리학의 세 번째 원칙, **"도덕은 사람들을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에 대해 논의한다. 이 3부의 네 장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비유는 **인간은 90%는 침팬지이고 나머지 10%는 벌과 같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자연선택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 선택은 두 가지 차원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먼저 어느 집단에서건 개인들은 그 안의 개인과 경쟁하게 되는바, 지금의 우리도 먼 옛날 이 경쟁에서 단연 뛰어났던 영장류의 후손이다. 이러한 경쟁에서는 인간 본성의 추악한 일면이 드러날 수밖에 없고, 인류의 진화론적 기원을 밝힌 책들도 보면 보통 인간의 그러한 모습을 뚜렷이 그려내고 있다. **우리 인간이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존재인 것은 분명 사실이다. 선한척하는 데 그야말로 이골이 난 우리는 심지어 자기 자신도 속일 수 있을 정도이니까.**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은 집단이 다른 집단과 경쟁하는 과정에서도 형성된다.** 다윈이 이미 오래전에 이야기했듯이, 대체로 보면 **집단 중에서도 단결력과 협동성이 가장 뛰어난 곳이 이기적 개인들로 구성된 집단을 이기게 되어 있다.** 이러한 다윈의 집단선택 사상은 1960년대 들면서 사람들에게서 냉대를 받았으나 최근에는 연구 성과들에 힘입어 새로이 조명을 받고 있는데, 여기에는 실로 엄청난 함의가 깔려있다. 우리 인간은 늘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존재이지는 않다. 그런 성향과 더불어 **우리는 특정 상황에 처하면 자신의 자아쯤은 얼마든지 접어두고 그 대신 더 커다란 몸체의 세포라도 된 듯이, 혹은 벌집 속에서 살아가는 꿀벌이라도 된 듯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될 때가 많다.** 물론 이러한 군집성으로 인해 우리는 다른 이들의 도덕적 관심사는 아예 못 보게 되는 수도 있다. 벌을 닮은 우리의 본성은 이타주의와 함께 영웅주의, 전쟁, 종족 학살을 부추긴다.
  **앞으로 나는 이 책에서 인간의 '고차원의 본성' 덕분에 우리가 지극히 이타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 이타주의는 대부분 자신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을 향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이와 함께 나는 종교가 (아마도) 진화상 적응의 산물임을 이야기할 것이다. **종교는 집단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은 물론 집단이 공통된 도덕을 가진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한다.** 최근 몇몇 과학자(이르바 '신부신론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종교는 바이러스도, 혹은 기생충도 아닌 것이다. 또 나는 이 관점을 활용해, 왜 사람들이 일부는 보수주의자가 되고 다른 일부는 진보주의자가 되며 이도 저도 아닌 이들은 자유주의자가 되는지를 설명해낼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과 똑같은 도덕적 서사를 가진 사람들과 뭉쳐 정치적 집단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살아가며 어느 한 가지 서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뒤로는 다른 대안적인 도덕 세계는 더 이상 보지 못한다.**
  앞으로 내가 풀어놓을 이야기는 주로 신경과학, 유전학, 사회심리학, 진화론 모델과 관련한 최신 연구들이 되겠지만, 우리가 간직해야 할 메시지는 이미 먼 옛날부터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독선적 위선자라는 사실, 바로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네 이웃의 눈에 든 티는 보면서 너 자신의 눈에 든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 위선자여, 먼저 너 자신의 눈에 든 들보부터 빼내어라. 그러고나야 비로소 또렷해진 눈으로 네 이웃의 눈에 든 티를 빼줄 수 있을 테니(<마태복음>7:3-5)`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진정 이해하고 싶다면, 즉 우리가 어떤식으로 분열되어 있고, 또 어떤 한계와 잠재력을 가졌는지 알고 싶다면, 이 순간만큼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윤리 도덕은 잠시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 대신 그 자리에 도덕심리학을 얼마간 적용해 **우리가 다 같이 발을 들이고 있는 게임이 어떤 식인지 그것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 1부 1원칙 : 바른 마음은 철저히 이기적이며 전략적이다 _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다음이다.
> 핵심 비유 : 둘로 나뉜 마음은 코끼리 위에 기수가 올라탄 모습이고 기수의 역할은 코끼리의 시중을 드는 데 있다.

### 1장 도덕성은 대체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 아이들은 옳고 그름을 어떻게 해서 알게 되는가? 즉, 도덕성이 처음 형성되는 곳은 어디인가?
  이 질문에는 으레 두 가지 대답이 나오곤 한다. 천성 아니면 양육,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천성 쪽에 손을 들었다면, 당신은 선천론자인 셈이다. 선천론자는 도덕적 앎이 우리 마음에 원래부터 들어 있었다고 믿는다. 그것이 미리 자리 잡은 까닭은, <<성경>>에서 말하듯 하느님이 우리 가슴에 그 내용을 새겨놓았거나 다윈의 주장처럼 우리의 진화한 도덕적 감정 속에 그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양육을 통해 도덕적 앎이 생겨난다고 믿는 쪽이라면, 당신은 후천론자(empiricist)인 셈이다. 이런 사람들은 갓 태어난 아이들이 거의 텅 빈 서판(존 로크의 표현을 빌리자면)에 가까운 상태라고 믿는다. 더구나 도덕성이란 나라나 시대마다 다 다른 법인데, 그것이 어떻게 선천적일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우리는 어린 시절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배운 것과 옳고 그름에 대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성인으로서의 윤리 의식을 형성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후천론자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후천론도 결국은 답이 아니었다. 그래서 1987년도에 도덕심리학은 도덕성의 기원에 대해 제3의 대답을 내놓기에 주력하고 있다. 거기서 나온 답이 **합리주의**로, 여기서는 도덕이 무엇인지를 아이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낸다고 주장했다. 고금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발달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는 고국 스위스에서 연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연체동물 및 곤충을 다루던 동물학자였다. 아이들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는데도 어떻게 거기서 정교한 성인의 사고가 나오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피아제는 아이들이 범하는 여러 오류에 초점을 맞추었다. 예를 들어, 아이들 앞에서 똑같은 유리컵 두 개를 준비해 거기에 똑같은 양의 물을 붓고 두 유리컵에 똑같은 양의 물이 들어 있는지 아이들에게 물었다(아이들은 "네"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피아제는 길쭉하게 생긴 유리컵을 하나 가져다 아까의 두 유리컵 중 하나의 물을 붓고, 이번에는 길쭉한 유리컵과 물을 그대로 둔 유리컵에 똑같은 양의 물이 들어 있는지 물었다. 그러면 예닐곱 살이 채 안된 아이들은 물 높이가 더 높기 때문에 길쭉한 컵에 물이 더 많이 들어 있다고 대답한다. (...) 더구나 이때에는 물의 양이 그대로라고 어른들이 설명해주어도 아무 소용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정 연령(및 인지능력이 생기는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래서 마음의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준비만 되면 아이들은 유리컵에 물을 담으며 노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이치를 깨친다.
  다시 말해, 물의 양이 보존된다는 사실을 선천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아니요 어른에게서 배우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아이들은 **스스로 그 이치를 깨치는데,** 다만 그러려면 반드시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하고, 더불어 거기에 맞는 적절한 경험이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인지능력 발달 접근법은 피아제가 아동의 도덕적 사고를 연구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 피아제의 주장에 따르면, 아이들이 도덕성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이 유리컵에 담긴 물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과 비슷했다. 즉, 도덕성에 대한 이해는 선천적이라고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그것을 어른에게서 직접 배운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놀며 도덕성에 대한 이해를 **스스로 세워나간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아이들이 놀 때 서로 차례를 바꾸는 것은 물을 이 컵 저 컵에 옮겨 담는 것과 비슷한 원리인 셈이다. 
  **아직 준비가 덜 된 아이들에게는 공평성 개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설명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다 이제 대여섯 살이 되어 친구들과 함께 놀이도 해보고, 말다툼도 벌여보고, 함께 힘도 합쳐본 후에는 차차 공평성이 무엇인지 알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어른들에게서 듣는 그 어떤 설교보다도 훨씬 효과가 있다.**
  이렇게 애벌레가 자라나 나비가 되듯이 우리 인간이 합리적 존재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심리학적 합리주의의 본질이다. 애벌레가 잎사귀를 충분히 갉아 먹으면 결국에는 몸에 날개가 돋아난다. 그러니 아이들도 차례 바꾸기, 함께 나누기, 운동장에서의 공정한 원칙을 몸으로 충분히 경험하고 나면 결국에는 윤리적인 존재가 될 것이고, 나아가 이 합리적인 능력을 활용하면 아무리 난처한 문제라도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합리성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천성이며, 훌륭한 도덕적 추론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은 곧 인간이 발달 과정을 완전히 마쳤다는 이야기이다. 

> 한편 피아제가 품었던 통찰력을 접하고 그 지평을 더 넓힌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로런스 콜버그(Lawrence Kohlberg)였다. 그는 1960년대의 도덕성 연구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고, 여기에는 두 가지의 핵심적 혁신이 주효했다. 그 중 첫 번째는, 아동의 도덕적 추론 능력은 시간이 가면서 변화하는데, 그 양상을 구체적으로 수량화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동은 나이가 어릴 때는 어떤 사람이 그 행동을 해서 벌을 받았는가와 같은 무척 피상적인 특징을 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다(어떤 어른이 어떤 행동을 해서 벌을 받았다면 그 행동은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다). 발달의 이 첫 두 단계에서 콜버그는 도덕적 판단의 '규약 미정립기'라는 명칭을 붙였는데, 피아제의 발달 이론에서는 피상적 특징만 보고 물리적 세계를 판단하는 단계에 해당한다(유리컵이 길쭉하면 그 안에는 더 많은 물이 들어 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대개 두 단계로 이루어진 '규약 정립기'에 진입하여 규칙 및 사회적 규약을 곧잘 이해하고, 심지어 그것을 제법 교활하게 다룰 줄도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 단계의 아이들은 규칙 준수에 꽤 신경을 쓰며 권위에도 커다란 존중을 표한다. 초등학생 떄에는 아이들이 권위의 정당성에 의문을 던지는 경우가 좀처럼 없다.
  **사춘기를 지나고부터는(피아제도 바로 이때부터 아이들에게 추상적 사고능력이 생긴다고 말했다) 아이들 일부가 권위의 본성, 정의의 의미, 갖가지 규칙과 법칙의 이면에 깔린 이유들을 스스로 생각해보기 시작한다.** '규약 탈피기'에 해당하는 두 단계 동안에도 10대 청소년들은 여전히 정직을 중요시하고 규칙과 법률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전 같지 않게 이제는 정직하지 못하거나 법을 어기는 행동도 더 숭고한 가치를 위해서라면(특히 정의를 위해서라면) 정당화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 아동들은 한껏 의욕에 찬 합리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는데, 콜버그는 그 모습을 자기 손으로 일관된 윤리 체계를 정립하려고 노력하는 '도덕철학자'의 모습으로 그렸다.

> 튜리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아이들은 보통 다섯 살만 되어도 남자아이가 규칙을 어긴 것은 잘못이지만 선생님이 허락했거나 교복 착용 규칙이 없는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남자아이가 사복을 입어도 괜찮다고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 **옷차림이나 먹을 것을 비롯해 생활의 각종 양식과 관련한 규칙은 일종의 사회적 규약(즉, 그것들은 임의적이고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 변할 수 있다는 사실)임을 아이들이 알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반면, 그네 타던 남자아이를 밀어 떨어뜨린 행위는 설령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거나 그네에서 아이를 밀면 안 된다는 규칙이 학교에 없더라도 그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거의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남에게 해가 가지 않게 하는 규칙이 곧 도덕적 규칙임을 아이들이 알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들은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절대적인 도덕적 진리를 주춧돌로 삼고 그 위에 도덕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하나하나 건설해나간다는 것이다. 물론 문화마다 규칙의 세부 내용은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튜리얼이 연구한 문화에서는 어느 곳이나 아이들은 도덕적 규칙과 규약적 규칙을 구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즉, 충성심, 존경심, 의무감, 경건함, 애국심, 전통 등의 덕목보다는 타인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공평성을 지키는 것이 도덕성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한편 위계나 권위는 대체로 훌륭한 것이 못 된다(그러므로 제일 좋은 방법은 아이들이 스스로 깨치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나 가정에서는 권위주의적 원칙에 따라 어른들이 아이들을 훈련시키고 제약하기보다는 평등과 자율성으로 대표되는 진보적 원칙을 구현하려고 애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 **다른 세상에는 다른 도덕이 있나**
  수단의 아잔데족 사이에 행해지는 주술에 관한 글이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주술에 대한 믿음이 세계 각지에서 정말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형성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국 다음의 두 시나리오를 떠오르게 하는데, 이 세상에 주술의 힘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이야기이거나 (좀 더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로) 인간 마음속의 무엇이 마녀라는 독특한 문화적 존재를 만들어낸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인간집단이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는 것도 어쩌면 이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들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당시 나는 피리핀 제도의 일롱고트족에 관해 읽어볼 수 있었는데, 이 부족 젊은이들에게는 **산 사람 목을 베어 오는 것이 곧 영에를 얻는 길이었다.** 수수께끼 같은 이 살인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남자들이 모인 소규모 집단에서는 분노와 갈등이 쌓이기 마련인데 그런 감정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사냥 파티'를 벌이고, 그로써 집단의 힘을 다진다는 것이다.** 종종 도덕성과 관련해서는 집단 '내부'에서 갈등이 생길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이 다른 집단과의 경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말이다. 
  세상에는 실로 무수한 도덕적 질서가 있는데, 미국과 서유럽은 그것들을 나름의 방법으로 단출하게 간추린 새로운 사회였던 것이다.
  튜리얼의 주장처럼 타인에 대한 피해 유무가 도덕성의 핵심이라면, 대부분의 비서양권 문화에서는 어떻게 타인에 대한 피해와 전혀 상관없는 많은 관습이 도덕의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
  튜리얼의 주장처럼 정말 아이들이 타인에 대한 피해 유무로만 비도덕적인 행동을 가려낸다면 순결 및 오염에 관한 그 모든 원칙을 서양 아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세워나간다는 이야기일 텐데, 그 점이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남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고통을 느끼는 것, 그것만으로 아이들의 도덕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틀림없이 합리주의를 넘어서는 무엇이 있을 터였다.

>**슈웨더와 튜리얼의 논쟁**
심리인류학자인 슈웨더는 한때 인도 동부 연안의 오리사(Orissa)라는 지역에 머물며 그곳에서 생활하고 일한 적이 있었다. (...)인간을 별개의 개인으로 보는 서양인의 사고가 사실은 무척 유별난 것임을 슈웨더는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Clifford Geertz)의 말을 빌려 이렇게 이야기한다. 
`서양의 사고에서 개인은 경계가 정해져 있고, 고유성을 지니며, 동기과 인식을 가진 하나의 통합된 우주이다. 또 개인은 인식, 감정, 판단, 행동의 역동적 중추로서 각종 기관을 갖추어 별개의 온전한 존재로 기능한다고 여겨진다. 이 온전한 존재는 자신과 유사한 별개의 존재와 대립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둘러싼 사회 및 자연의 주변 환경과도 대립한다. 그러나 우리 머릿속에 이런 개념이 아무리 뿌리 깊이 박혀 있다 해도, 세계 문화 전반의 맥락에서 봤을 때 개인에 대한 이러한 사고는 다소 특이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문화에 따라 자아의 개념이 이토록 차이 나는 이유에 대해 슈웨더는 한 가지 간단한 사상을 가져다 설명한다. 모든 사회는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방식에 대해(즉, 개인과 집단의 요구가 상충할 때 가장 막강한 존재가 이를 어떻게 조율할지를 두고) 몇 가지 문제를 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문제를 다루는 해법을 크게 나누면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로, 이제까지 대부분의 사회가 택해온 것은 **사회중심적** 해법이었다. 이는 집단 및 기관의 요구를 우선순위에 놓고 개개인의 요구는 그 아래에 두는 것을 말한다. 이와는 반대로 **개인주의적** 해법에서는 개인을 중심에 놓고 사회에 개인의 종복 역할을 맡긴다.  고대에만 해도 세계 대부분에서는 사회중심적 해법이 지배적이었으나,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부터 그에 대항하여 개인주의적 해법이 막강한 라이벌로 부상했다. 그러다 최근 들어서는 사회중심적 해법에서 개인주의적 해법 쪽으로 승세가 완전히 넘어간 형국이다.
(...) 여기에 극사회중심적(ultrasociocentric) 성향의 파시스트 및 공산주의 제국이 갖가지 만행을 저지르며 서양 세계를 공포에 질리게 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슈웨더가 보기에 콜버그와 튜리얼의 이론은 개인주의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 이론이 과연 오리사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 그는 의문이었다. 오리사는 사회중심적 도덕성이 발달한 데다 개별 자아들도 상호 의존적으로 얽혀 있는 곳이었다.
  39개의 이야기에는 대체로 타인에게 해가 될 것도 불공평할 것도 없는 상황이 그려져 있었다. 적어도 5세 아동은 이 이야기 중 명확히 해가 가거나 불공평한 상황은 하나도 없다고 보았고, 미국인도 거의 대부분 충분히 용인되는 행동이라고 답했다. 튜리엘의 예측대로라면 그런 행동에 인도인들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답한 것은 그저 사회적 규약을 어긴 것에 대한 비난이 된다. **그러나 인도인 피험자 대부분은(심지어 5세 아동조차도) 그런 행동이 어느 때건 어디서건 잘못이라고 말했다. 음식, 성생활, 의복, 이성간 관계와 관련된 인도의 관습은 거의 백이면 백 사회적 규약이 아니라 도덕적 쟁점으로 판단되었다. 한마디로 슈웨더는 오리사에 자리한 사회중심적인 문화 속에서는 **사회 규약적 사고는 거의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곳에서는 "사회적 질서가 곧 도덕적 질서"인 것이다.**
  슈웨더의 이런 연구 결과가 정말 사실이라면, 튜리얼의 이론은 설득력을 잃는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아이들이 스스로 도덕성을 깨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연구에 사용된 이야기는 대체로 물고기 먹는 과부의 경우처럼 명확히 피해가 가지도 않고 부당하지도 않은 것들이었고, 예상대로 미국인들은 그런 경우에 대해 별문제가 없다고 답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은, **미국인 역시 이런 행동을 대중의 합의를 통해 얼마든 변화하는 사회 규약의 틀에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일 사람들이 과부의 자유를 제한하려 드는 나라가 있다면 그들은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는 미국에서조차 사회적 질서가 곧 도덕적 질서라는 이야기인데, 다만 그 질서는 개인주의적인 것이어서 개인의 보호와 자유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도덕과 단순한 규약의 구별은, 도덕적 지식을 스스로 세워가며 아이들이 쓰는 연장이 아니었다.** 그보다 도덕과 규약의 구별은 문화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임이 드러났다. **개인과 집단 간 문제를 개인주의적 틀에서 답하며 나온 필연적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튜리얼은 주장하길, 인도인들이 (177)

>**역겨움과 경멸감**
  **이렇듯 중요한 문화 규범에 대한 직감과 무해성에 대한 논리적 추론이 서로 대치하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놓고, 나는 그것들을 성인과 아동에게 각각 제시해볼 생각이었다. 그러면 직감과 논리 중 어느 것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튜리얼의 합리주의가 예측하는 바에 따르면, 도덕성 발달의 기반은 피해 유무를 판단하는 논리적 추론 능력이다. 따라서 튜리얼의 논리대로라면 사람들은 개를 먹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설령 잘못이라고 말하더라도 도덕성보다는 사회적 규약을 어긴 차원에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물론 우리는 개를 안먹지만, 뭐 어쩌겠어요. 다른 나라 사람들이 키우던 개가 죽었을 때 그걸 땅에 묻어주기보다 먹고 싶어 한다면, 그걸 가지고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있을까요?). 한편 슈웨더의 이론이 맞는다면, 튜리얼의 이러한 예측은 개인주의가 일상화된 사회에서나 통할 뿐, 그 외 다른 지역에서는 통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희생자 만들기**
사람들은 정말로 그러한 피해가 있을거라고 미리 내다봤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비난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는 어떨까? 즉, 그런 행동을 자신이 이미 비난했기 때문에 그런 피해가 있다고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이야기 속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은 보통 아주 순식간이었는데,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결정하는 데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희생자를 제시하는 일에는 종종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희생자를 댈 떄도 보통 건성으로, 그리고 거의 변명하듯 이유를 제시했다.
  사람들은 마치 **도덕적 당혹감을 느끼는** 듯한 모습이었다. 직관적으로는 알겠는데 말로 설명이 안 되어 할 말을 잃는 것이다.
  그렇다고 피험자들이 논리적 추론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논리적 추론을 하기 위해 무척이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를 찾기 위한 추론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감정에서 나온 반응을 뒷받침하기 위한 추론이었던 것이다.** 이런 추론에 대해서는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설명한 바 있는데, 1739년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성은 열정의 하인이며, 오로지 열정의 하인이어야 마땅하다. 이성은 열정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그 외의 다른직(직책 직職)은 결코 탐낼 수 없다".
  도덕적 추론이 종종 도덕적 감정의 하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니, 당시 도덕심리학계를 장악하고 있던 합리주의적 접근 방식에는 큰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1장 요약**
- 도덕성의 범위는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서양적이고, 교육 수준이 높고, 개인주의적인 문화에서는 도덕성의 범위가 몹시 좁다. 반면 사회중심적 문화에서는 도덕성의 범위를 넓히는 경향이 있는데, 이로써 삶의 더 다양한 측면을 아우르고 통제한다.
- 사람들이 갖는 직감(특히 역겨움 및 경멸감과 관련된 것)은 때로 도덕적 추론을 진행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 도덕성은 아이들이 피해의 개념을 잘 이해하게 되었을 때 스스로 세워나가는 것만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틀림없이 문화를 통한 학습이나 문화적인 유도가 합리주의 이론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이렇듯 도덕성이 주로 도덕적 추론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면, 선천성과 사회적 학습이 어떻게든 조합되어 도덕성이 형성된다는 주장이 가장 가능성 높은 대답으로 남는다. 앞으로 이 책에서는 도덕성이 어떻게 선천적인 동시에(일련의 진화한 직관의 형태로 나타난다) 학습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아이들은 그러한 직관을 특정 문화 속에 적용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설명하려고 한다. 

### 2장 도덕은 너무나도 감성적이다
>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는 그의 작품 속 한 인물을 통해 이런 탄식을 하였다. "지금 나는 무언지 모를 새로운 힘에 질질 끌려가고 있어. 욕망과 이성이 저마다 다른 길로 나를 이끌고 있지.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는 나도 알아. 입도 그것이 옳다고 하지. 하지만 정작 내 발은 잘못된 길을 밟고 있다네."
  마음의 이러한 갈등을 이해시키기 위해 고대 사상가들이 내놓은 비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플라톤의 대화록 <<티마이오스(Timaeos)>>만큼 그 비유가 생생한 곳도 드물다. 이 책의 화자 티마이오스는 신들이 인간을 비롯하여 이 우주를 어떻게 창조해냈는지 설명해준다. 
`창조신은 완벽하고 또 완벽한 것만 창조하는 신이었기에, 자신이 만든 이 새로운 우주를 애초에 영혼으로(또 영혼 안에서도 가장 완벽한 것이라고 하면 완벽한 합리성일 것이다)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완벽하고 합리적인 영혼을 무수히 만들어낸 창조신은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고, 창조에 필요한 나머니 일들은 하급의 몇몇 신에게 맡겼다. 이들은 창조신이 만들어낸 영혼들을 어떤 그릇에 담으면 좋을지 최선을 다해 구상했다. 신들은 먼저 영혼들을 여러 가지 형태 중에도 가장 완벽한 모양, 즉 구(공 구球)에 담는 일부터 시작했고, 우리 인간의 머리가 둥글둥글한 형태를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해보니 이런 둥글둥글한 머리가 지구의 울퉁불퉁한 땅 위를 굴러다니려다 보면 어렵기도 하고 꼴도 사나울 것이다. 그래서 신들은 머리를 이고 다닐 몸을 만들어 냈고, 각각의 몸에는 제2의 영혼을 불언넣어 원기를 주었다. 제2의 영혼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쾌락, 감정, 감각, ...,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악이었다. 신들은 인간의 신성한 머리가 이 소란스러운 몸과 '어리석은 조언자'로부터 약간이라도 떨어져 있을 수 있게 그 중간에 목을 만들어 달아주었다. 
  창조 신화라면 대부분 시조가 되는 부족이나 조상이 중심에 등장하는 법인데, 여기서는 그 대신 정신의 기능을 칭송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여겨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자의 신화 속에서 철학자의 모습이 아주 그럴싸하게 그려지는 것을 알면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다. **이러한 신화를 통해 사람들은 이성이 언제까지고 대사제의 직을 차지해야 함을, 또 냉철한 철학자 왕이 언제까지고 이 세상을 다스려야 함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합리주의자들이 꿈꾸는 이상으로, 흄의 공식을 180도 뒤집은 것이다(즉, 감정은 이성의 하인이며 오로지 이성의 하인이어야 마땅하다). 이렇듯 감정을 무시한 플라톤의 사상에 누군가 의구심을 품을 것을 대비해 티마이오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감정을 완전히 제어하는 자는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삶을 살게 되며, 나중에 죽어서도 천국에 태어나 영원히 행복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감정에 지배당한 채 사는 자는 나중에 죽어서 여자로 환생할 것이다. 
  합리주의의 전통은 플라톤에서 시작되어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를 거쳐 로런스 콜버그에까지 곧바로 이어지고 있다. (...) **그 대상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자들은 사람들이 믿도록 경건한 환상을 만들어내지만 현실은 그것과 맞지 않으니, 언젠가는 그들이 좌대 위에 세워놓은 성상을 누군가 밀어 넘어뜨리는 날이 온다. **흄이 한 작업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성이 열정의 하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의 주장은 철학에는 신성모독이나 다름없었다.**

> 우리에게는 **마음에 관한 모델이 세 가지 생긴 셈이다. 플라톤은 이성이 주인의 자리에 있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그럴 경우 오로지 철학자들이나 대가의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 해도 말이다. 흄은 이성이 열정의 하인이고, 또 하인이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여기에 제퍼슨의 제3안에 따르면, 이성과 감성은 서로 독립적인 공동통치자와도 같다.** 그 옛날 로마제국의 황제들이 제국의 땅을 동서로 나누어 반씩 다스렸던 것처럼 말이다. 과연 이들 중 옳은 것은 누구일까?

>**진화론과 도덕의 관계**
도덕성은 살아생전 다윈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던 주제였다. 그는 전반적으로 생물체 사이의 경쟁과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는데, 그러려면 **생물체에서 발견되는 협동의 사례를 그 이론에 잘 끼워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도덕성에 관한 한 다윈은 선천론자였다. 우리의 마음은 자연선택에 의해 주어지며, 도덕적 감정은 그 마음속에 애초부터 들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점점 발전하던 사회과학에 도덕주의의 물결이 두 번 밀려들었고, 이때 사회과학의 흐름이 뒤바뀌면서 선천론은 그만 도덕적 범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첫 번째 물결은 인류학자를 비롯한 기타 세력들이 '사회적 다윈주의'에 공포를 품게 된 것이었다. 사회적 다윈주의란 가장 부유하고 가장 성공한 국가, 인종, 개인이 적자(適맞을 적, 者사람 자)가 된다는 사상이었다.(다윈은 이 아이디어를 내놓기는 했어도 지지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자연스러운 진화 과정에 위배되는 일이다.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풀면 그들이 번식해나갈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특정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선천적으로 우월하다는 이런 주장은 후일 히틀러가 기치로 내건 것이었다. 
  도덕주의의 두 번째 물결은 1960~1970년대에 미국, 유럽, 라틴아메리카의 각지 대학을 휩쓸었던 급진주의 정치 성향을 일컫는다. 급진적 개혁가들은 보통 인간의 본성이 텅빈 서판과도 같다고, 따라서 그 위에는 유토피아적인 비전을 그릴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런데 진화의 결과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조합의 욕망과 기술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라면, 그 사실은 상당수 전문 직종에서 양성 평등을 실현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었다. 선천론이 기존의 권력 구조를 정당화하는 데 한몫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필시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이런 주장 역시 논리적 오류이지만, 우리가 가진 바른 마음은 바로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2002년에 펴낸 <<빈 서판 :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The Blank Slate : The Modern Denial of Human Nature>>를 보면 당시 과학자들이 진보주의 운동에 충성한다는 명목으로 과학의 소중한 가치들을 어떤 식으로 저버렸는지 드러나 있다. 강단에 선 과학자들은 '도덕의 선전자'가 되어 동료 과학자를 악마로 몰아가는 한편, 학생들에게는 사상을 평가하는 잣대로 진리를 내걸지 않았다. 인종 평등과 양성 평등 등 당시의 진보주의 이상과 합치하느냐로 사상을 평가하도록 한 것이다. 
  1975년에 생태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사회생물학 : 새로운 종합(Sociobiology : The New Synthesis)>>라는 책의 마지막 장에 자연선택이 인간의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가 보기에 인간에게는 본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분명 존재했고, 그러한 인간 본성은 (우리가 자녀를 양육하거나 새로운 사회제도를 구상하는 문제 등에서) 무한정 성취가 이뤄지지 않게 제약을 가할 것이었다. 윌슨이 보기에 합리주의자들은 도덕적 직관은 진화를 통해야 가장 잘 설명되는데, 그들은 그것을 머리를 굴려 정당화하고 있었다. 
  윌슨은 흄과 입장이 같았다. 그의 예측에 따르면 윤리학을 연구하는 일은 조만간 철학자들의 손에서 벗어나 "생물학의 영역이 될" 것이니,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인간 본성의 연구가 윤리학과 하나로 짜 맞추어질 것이었다. 철학, 생물학, 진화의 이러한 결합은 윌슨이 꿈꾸던 '새로운 종합'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나중에 윌슨은 이를 **통합(consilience)**이라고 불렀다. 여러 사상이 "경계를 뛰어넘어 다 같이" 하나의 통일된 지식 체계를 이루게 된다는 의미였다. 

>**어쩌다 도덕을 이성의 영역이라 생각하게 되었나**
  심리학의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도덕성의 기반이 감정에 있다고 보는 뛰어난 책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의 <<선한 본성 : 인간 및 여타 동물에게서의 옳고 그름의 기원(Good Natured: The Origins of Right and Wrong in Humans and Other Animals)>>에서 나타난 드 발의 주장은 침팬지에게도 도덕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도덕 체계 및 공동체 성립 시의 심리적 구성물이 있는데, 침팬지(그리고 여타 유인원)도 그것을 대부분 갖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적 구성물은 대체로 동정심, 두려움, 분노, 애정 같은 감정적인 것들이었다. 
  이때 나는 신경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가 쓴 <<데카르트의 오류(Decartes' Error)>>라는 책도 읽어볼 수 있었다. 다마지오가 애초 연구를 시작한 것은 환자들이 뇌의 특정 부위, 즉 복내측 전전두엽 피질(약어로 vmPFC, 콧등 맨 위쪽 바로 뒤에 자리 잡고 있다)에 손상을 입으면 특이한 증상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되면서부터였다. **감정과 관련한 이들의 능력은 거의 제로 수준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아는 능력은 전과 같이 온전했고, IQ에도 결함은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콜버그의 도덕적 추론 능력 테스트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신의 사생활이나 직장 생활에 들어가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이들은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기 일쑤였고, 아니면 아예 결정 자체를 내리지 못했다. 
  다마지오의 해석에 따르면 이는 합리적 사고에는 반드시 직감 및 신체의 반응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고, 심사숙고하는 의식의 활동에 직감을 통합시키는 것이 바로 vmPFC의 일이라는 것이었다.
  vmPFC가 멈춰버린 상태에서 사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순간순간의 선택지가 이것저것 다 좋게 느껴진다. 따라서 이들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의식적이고 언어적인 추론을 이용해 해당 선택지의 장단점을 일일이 따져가며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선택지의 수가 예닐곱 개(우리 단기 기억 능력의 최대 수용치)를 넘어가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진다는 걸 여러분도 잘 알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며 매 순간 매 상황에 이런 식으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내 삶은 과연 어떻게 될까. 매 순간 그것도 매일같이 세탁기 열 대 중 제일 좋은 한 대를 고르는 식으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말이다. 아마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마지오의 연구 결과는 플라톤의 사상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연구에 등장한 환자들은 뇌의 특정 부위가 손상을 입는 바람에 합리적인 영혼과 육체의 소란스러운 감정이 사실상 서로 의사소통을 못하게 된 상태였다. 덕분에 이들의 합리적 이성은 더 이상 "끔찍하지만 꼭 필요한 방해물"이나 "어리석은 조언자" 때문에 길을 잃고 헤매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정작 **둘의 연결이 끊어졌을 때 나타난 결과는 이성이 감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을 맛본 것이 아니었다.** 이로써 드러난 충격적 사실은 오히려 합리적 추론에는 **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제퍼슨의 모델이 정말 맞는 것이라면, 다마지오의 환자들은 삶의 나머지 절반, 즉 머리가 이끄는 부분에서는 제법 잘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순수하게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일에서조차 의사결정 능력을 보이지 못했으니, 의사결정 능력의 붕괴는 모든 곳에서 두루 일어났다. **머리는 가슴 없이는 머리로 하는 일조차 제대로 못 해내는 것이다. 따라서 다마지오의 연구 결과에는 흄의 모델이 가장 잘 맞는다고 할 수 있었다.** 주인(열정)이 갑작스레 운명을 달리하여 세상을 떠나도 하인(이성)에게는 통치의 능력도 통치의 욕구도 없다. 그러니 결국은 모든 게 파멸해버리고 만다.

>**2장 요약**
-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사람들은 강하게 직감하고, 그 느낌을 사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사후 정당화의 근거를 만들어낸다. 설령 하인(추론 능력)이 아무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와도 주인(직관)은 자신이 내린 판단을 바꾸지 않는다.
- 사회적 직관주의자 모델은 흄의 모델을 기초로 하되 거기에 좀 더 사회성을 불어넣은 형태이다. 사람들은 친구를 얻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일평생 모질게 애쓰는데, 도덕적 추론도 그런 노력 중 하나이다. 내가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다음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따라서 도덕이나 정치 문제와 관련해 누구의 마음을 바꾸고 싶다면, 코끼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 자신의 직관에 어긋나는데 그것을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하며나, 그들은 전력을 다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것이다. 

### 3장 나는 바르다, 남이 잘못이다.
>먼저 샐리아는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어 그들이 특정 단어를 보면(절반은 'take'라는 단어에 대해, 나머지 절반은 'often'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 순간 당장 구토감이 느껴지도록 했다. 설문지에서 피험자들이 해야 했던 일은 도덕 위반에 관한 여섯 개의 짤막한 이야기를 읽고 평가하는 것이었다. 평균적으로 보아 피험자들은 자신의 **최면 암호 단어가 들어가 있을 때 여섯 개의 짧은 이야기 모두에 대해 더 구토감을 느끼고, 또 그것이 도덕적 잘못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
  그러나 정말 놀라웠던 결과는 일곱 번째 이야기에서 나타나는데, 등장인물이 도덕을 위반한 부분이 전혀 없었다. 학생회장 댄이 토론 활성화를 위해 교수와 학생 모두가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주제를 택하려고(take) 노력한다 와 나머지 절반에게는 댄이 "종종(often) 교수와 ~ 주제를 고른다"라고 표현만 바꾸었다. 우리가 뒤늦게 이 이야기를 넣은 목적은, **직관의 힘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예상대로라면 피험자들은 이 이야기를 읽으며 순간 구토감을 느끼더라도 그런 자신의 직감을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전체의 3분의 1 정도가 자신의 직감에 따라 최면 암호 단어가 이야기 속에 들어 있었던 댄의 행동을 잘못 되었다고 말했고, 때로는 아주 큰 잘못이라고까지 했다. 이들이 이렇듯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지어낸 것은 자신들이 직감(정확히 말하면 샐리아가 최면으로 심어놓은 느낌)을 통해 내린 판단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뇌는 도덕을 어떻게 평가하나?**
뇌가 모든 것을 평가하는 기준은 하나로, 그것이 자아에 장차 위협인가 아니면 혜택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고 난 후 뇌는 좋은 것은 더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덜 받아들이는 쪽으로 행동을 적응시킨다. 동물의 뇌는 이런 식의 평가를 매일 수천 번 내리는데, 이때 의식적 추론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모든 평가의 목적은 하나로, 동물의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다음과 같은 질문에 뇌가 최선의 답을 내놓게 하는 것이다. "다가갈 것인가, 아니면 피할 것인가?"**
  실험심리학의 창시자 빌헬름 분트(Wilhem Wundt)는 1890년대 들어 '정서적 우선주의(affective primacy)'라는 원칙을 정식화했다. 여기서 '정서(affect)'란 우리가 순간순간 경험하는 긍정 혹은 부정의 자잘한 느낌들을 가리키는데, 이 느낌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에 다가갈지 아니면 그것을 피할지를 미리 준비하게 된다. 우리의 정서적 반응은 그야말로 찰나에 일어나기 때문에 거기에 감정이라는 말은 붙이지 않는다(예를 들어, 우리가 **행복**이나 **역겨움** 같은 단어를 읽었을 때 바로 그 순간 느껴지는 미세한 감정이 정서적 반응에 해당한다)
  분트의 이 정서적 우선주의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지만,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자이언스(Robert Zajonc)가 1980년에 이를 부활시켰다. 당시 심리학자들 사이에서는 인간을 냉철하고 합리적인 정보처리 장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사람들은 사물을 인식하고 그것을 범주화한 뒤에야 그에 대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었는데, 자이언스는 이런 견해에 반대했고 몇 가지 기발한 실험을 했다. 생경한 외국어나 아무 뜻없이 휘갈긴 선들을 보고 그 호감도를 평가하라니 엉뚱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이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 이보다 중요했던 것은 자이언스가 **사람들에게 어떤 단어나 이미지를 여러 번 보여주어 그것에 대한 호감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뇌는 익숙한 것에 좋다는 딱지를 붙인다. **자이언스가 '단순노출효과(mere exposure effect)'라고 이름 붙인 이 현상은 광고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자이언스는 기념비적 저작으로 손꼽히는 한 논문에서 심리학자들이 쌍방향 모델을 사용해야 하고, 거기서 1차 과정은 정서 혹은 '느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서나 느낌이 우선권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먼저 일어나는 과정인 데다(느낌은 인지 작용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 속도가 지극히 빠르다) 좀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느낌은 동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따라서 행동에도 강력항 영향을 미친다). **그 뒤에 일어나는 과정(즉, 사고)은 진화의 면에서 보면 인간에게 새로이 주어진 능력으로, 그 뿌리는 언어에 있으나 동기와 밀접한 관련은 없다.** 다시 말해 사고는 기수, 정서는 코끼리인 셈이다. 
  자이언스 말에 따르면, 사고가 느낌과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정서의 반응이 너무도 빠르고 강력하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말에게 씌우는 눈가리개의 기능을 한다. 즉, 정서 반응은 나중에 사고가 이용할 수 있는 "대안의 틀을 미리 좁혀버린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일수록 더 감성적이다**
각 쌍의 뒤에 있는 단어만 눈으로 보고 그것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꽃 - 행복
미워하다 - 햇빛
사랑하다 - 암
바퀴벌레 - 외로운
이 과제를 컴퓨터 화면 위에서 보게 되면 각 쌍의 첫 번째 단어를 0.25초 동안 보게 되고 그 뒤를 이어 곧바로 두 번째 단어를 보게 된다. 이렇게 과제를 진행시켜보면 아마도 우리는 '행복'과 '외로운'의 쌍보다는 '햇빛'과 '암'의 쌍에 가치판단을 내리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효과를 **'정서적 점화'**라고 하는데, 첫 번째 단어가 일순에 번쩍 정서를 촉발시켜 마음의 노선을 어느 한쪽으로 미리 정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왼쪽 아니면 오른쪽, 어느 한쪽으로 가리라 미리 예상하면서 코끼리의 몸을 그쪽으로 약간 틀어놓는 것과 비슷하다. 이 정서적 점화는 0.2초 내에 효과를 보이며, 나타난 효과는 이후 약 1초간 지속된다. 단, 그러려면 예기치 못한 충격 때문에 점화 효과가 무효가 되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점화 효과가 나타나는 일 짧은 시간대 내에 화면에 두 번째 단어를 보여주는데, 만일 그것이 동일한 성질의 것이면 여러분은 이미 마음이 그 방향으로 튼 상태이기 때문에 반응시간이 그만큼 더 빨라질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첫 번째 단어(미워하다)로 인해 여러분의 마음이 부정적 평가 쪽으로 틀어져 있었는데 거기서 긍정적인 단어(햇빛)를 보여주면, 여러분은 부정적으로 기울였던 마음을 원상태로 돌려놔야 하기 때문에 반응하는 데 약 0.25초의 시간이 더 걸린다. 
  그러나 사회심리학자들이 이 이론을 가져다 **사회적 집단**을 점화 요인으로 쓰기 시작하자 뜻밖의 커다란 성과가 나타났다. 이를테면 흑인과 백인의 사진을 점화 요인으로 삼는다면 여러분의 반응 속도는 과연 그것에 영향을 받을까? 만일 여러분이 은연중에(즉,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에 대해 미리 판단을 내리고 있다면, **그 예단 속에는 일순의 정서가 포함되어 있을 테고 그것들이 여러분의 반응시간에 변화를 줄 것이다.** 우리는 내재적 연관 검사(Implicit Association Test : IAT)를 진행해가며 우리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가치와 우리 안의 암묵적 태도 사이에 어느 정도가 괴리가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 검사를 통해 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흑인, 이주자, 뚱뚱한 사람, 노인 등 갖가지 사회 집단에 대해 부정적인 내재적 연관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노인 같은 집단(즉, 도덕적으로는 거의 비난할 일이 없는 집단)에 대해서도 이렇듯 코끼리는 그들에게서 멀어지는 경향을 보이니, **사람들이 정치적 반대편에 대해 상당히 많은 편향(예단)을 보일 것은 당연한 일로 예상되었다.**
  그는 보수와 진보 양편을 모두 데려다 정치적 색채가 강한 단어들을 읽게 한 뒤 그들의 뇌파를 측정해보았다. 즉, 앞선 방식을 그대로 따르되 '꽃'과 '미워하다'라는 말 대신 '클린턴, 부시, 국기, 세금, 복지, 생명 존중'이라는 단어들을 이용한 것이다(생명 존중을 뜻하는 'pro-life'라는 말은 미국에서 정치적 입장과 연관되어 흔히 '낙태 반대'의 의미를 가짐. 미국의 진보주의는 주로 여성 인권의 측면에서 낙태에 찬성하는 입장임-옮긴이).
  진보주의자들에게는 '생명 존중'과 '햇빛'이 정서적으로 짝이 안 맞는 조합이었고, 보수주의자들에게는 '클린턴'과 '햇빛'이 그러했다. 물론 '생명'과 '존중'이라는 말은 단어 자체가 모두 긍정적인 뜻을 가지지만, 열성 당원이라 함은 수십 수백 개의 특정 단어에 자신이 어떤 식의 직관적 반응을 보여야 옳은지 이미 습득한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안의 코끼리는 '생명 존중' 같은 용어가 나왔을 때 어느 쪽으로 몸을 틀지 알고 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나의 코끼리가 몸을 이리로 틀었다 저리로 틀었다 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주변에서 나와 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신뢰하게 된다. 
  정치와 관련한 판단에 직관적 성격이 있다는 사실은 프린스턴 대학에 있는 알렉스 토도로프(Alex Todorov) 교수의 연구에서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연구를 위해 수백번에 걸쳐 실시도니 미국의 상,하원 선거에서 당선자와 2위 후보의 사진을 수집했다. 그러고는 소속 정당에 대한 정보는 일절 제공하지 않은 채 각 선거에서 맞붙었던 후보 둘의 사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어떤 사람이 더 유능해 보이는지 물었다. 설문 결과, 피험자들에게서 더 능력 있어 보인다고 판단된 사람이 선거에서 실제 승리를 거둔 경우가 전체의 약 3분의 2에 달했다. 한편 피험자들은 후보의 신체적 매력이나 전반적 호감도와 관련해서도 순간적 판단을 내렸는데, 승리를 예측하는 데에서는 앞의 것만큼 좋은 지표가 되지는 못했다. 이는 **곧 능력에 대한 판단이 전반적인 긍정의 느낌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즉,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직관이 동시에 떠오를 수 있고, 이 직관들은 저마다 다른 종류의 정보를 처리하는 것이다.**
  나아가 토도로프는 화면에 10분의 1초 동안만 각 후보의 사진을 보여주고 피험자들에게 강제하다시피 능력 판단을 내리게 했는데, 이때 역시 능력에 대한 순간적 판단은 실제 선거에서의 승리 결과와 잘 맞아떨어졌다. 우리 뇌는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을 순식간에 처리한다는 이야기이다.**

>**신체 상태에 따라 도덕성이 좌우된다.**
사람들은 공기에서 구린내가 났을 때 더 혹독한 판단을 내리는 경향이 있었다. 또 다른 연구진은 사람들에게 쓴 음료와 달콤한 음료를 마시게 한 후 설문지를 작성시켜보았는데, 역시 똑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 대학에서 일하는 나의 동료 제리 클로어(Jerry Clore)의 표현대로, **결국 우리는 "정서를 일종의 정보로" 활용하는 셈이다.**
  설문을 작성하기 전 비누로 손을 씻게 하자 피험자들은 도덕적 정결(포르노, 약물복용) 관련 이슈에 대해 더 원칙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단 몸을 깨끗이 하고 나면 더러운 것은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종 교수는 그 역의 과정이 성립한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즉, 사람들은 비도덕적인 일을 접하면 깨끗이 씻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도덕적 일탈을 기억하게 할 경우, 아니면 단순히 다른 누가 저지른 도덕적 일탈을 손으로 베껴 쓰게만 해도 자신도 모르게 청결을 더 자주 생각하고 자기 몸을 씻고 싶어 하는 욕구를 더 강하게 가진다. 종교수는 여기에 맥베스 효과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남편에게 던컨 왕을 죽이라고 부추겼던 맥베스 부인이 왕이 죽고 나서는 물과 청결에 강박증을 보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판단은 우리가 피해, 인권, 정의를 재고 따져 순전히 머리로만 내리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 판단은 급속도로 이루어지는 자동적 과정으로, 동물들이 세상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내리는 판단과 비슷하다.**

>**살인자에게는 오로지 생각만 있다**
첫째로 사이코패스들은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고(이러한 충동적이고 반사회적인 행동은 유년기부터 시작된다), 둘째로 이들에게는 도덕적 감정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다. 이들은 동정심, 죄책감,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며, 심지어 당황하지도 않는다. 
  사이코패스가 되고 말고는 잘못된 양육이나 어린 시절 트라우마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이고, 그 외 양육을 바탕으로 한 설명 역시 어느 것도 사이코패스에게는 통하지 않는 듯하다. **한마디로 그것은 유전적으로 물려받을 수 있는 일종의 병증으로, 이 병증이 만들어놓은 뇌는 타인의 요구, 고통, 존중감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감흥이 없다. 이때 기수는 지극히 정상으로, 전략적 추론 능력도 곧잘 발휘한다. **그러나 기수는 우리 안에서 도덕의 나침반 역할을 해주지 않는다.**

>**갓난아기도 착한 사람을 알아본다**
옛날에는 심리학자들이 보통 갓난아기의 마음은 텅빈 서판과도 같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발달심리학자들이 갓난아기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러 방법을 발명하면서, 실상 갓난아기의 서판에는 이미 많은 내용이 쓰여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과거 심리학자들의 말대로 갓난아기의 세상이 모든 게 정신없이 뒤범벅된 상태라면, 그들 눈에는 모든 게 똑같이 놀라운 것으로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변 사건들을 특정 방식으로 해석하게끔 갓난아기의 마음에 이미 회로가 짜여 있다면, 아기들은 세상이 자기 예상을 깨고 돌아갈 때 놀라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 착안해 심리학자들은 갓난아기들이 물리학 및 역학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아기들은 물체가 뉴턴의 운동법칙에 따라 움직이리라는 기대를 이미 갖고 있고, 따라서 심리학자들이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장면을 보여주자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이를 테면 장난감 차가 단단한 물체를 뚫고 지나간 것처럼 보이는 장면). 심리학자들이 이런 사실에 확신을 가진 까닭은, 아기들이 그와 비슷하지만 덜 신기한 장면(이를테면 장난감 차가 단단한 물체 바로 뒤를 지나가는 장면)보다는 이런 불가능한 장면을 더 오랫동안 쳐다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은 더 깊이 파고들어, 아기들이 물리적 세계뿐 아니라 **사회적 세계**에 대해서까지 어느 정도 이해 능력을 갖췄음을 밝혀냈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남을 돕는 것 등의 개념을 아기들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밝혀낸 것은 예일 대학의 심리학자 킬리 햄린(Kiley Hamlin), 캐러 윈(Karen Wynn), 폴 블룸(Paul Bloom)으로 그들은 6~10개월의 영아들을 데려다 놓고 인형극을 보여주는 실험을 했다. '오르기쟁이'(나무 블록에 눈을 두 개 붙여 만들었다)라는 인형이 끙끙대면서 언덕을 올라간다는 내용이었다. (...) 오르기쟁이 인형이 도우미 인형과 방해꾼 인형을 번갈아 쳐다보다 결국 방해꾼 인형과 놀기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아기들의 사회적 세계에서 이것은 장난감 차가 단단한 물체를 뚫고 지나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아기들은 그 광경을 오르기쟁이가 도우미 인형과 놀기로 했을 때보다 더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아기들은 도우미 인형에 훨씬 더 손을 많이 뻗는 경향을 보였다. 아기들이 자신의 사회적 세계에 대해 이리저리 따져보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별생각 없이 아무 인형이나 골랐을 것이다. 그러나 아기들은 분명 착한 인형을 더 원하는 모습이었다. (...) 코끼리는 언어 능력과 추론 능력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인 영아시절부터 벌써 도덕적 판단 비슷한 것을 내리고 있다는 뜻이다. 

### 4장 도덕은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과 같다.

> 웨스턴은 두 후보가 위선자처럼 보이는 상황을 가지고 각파의 당원들에게 잠시 위기감을 준 것이었다. 한편 각파의 사람들은 상대편 후보의 위선이 들통 나는 것 같을 때는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는(어쩌면 일말의 기쁨까지 느끼는) 모습을 보일 것이었다. 
연구 결과 드러난 자료는 흄의 입장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피험자들은 위협적인 정보(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위선적인 행동)를 접하자 감정과 관련된 뇌의 영역(즉, 처벌에 대한 부정적 감정 및 반응과 관련된 영역)이 곧바로 활성화되었다. 즉, 마음의 수갑("내가 이것을 믿어야만 하나?")이 옥죄어온 것이다. 
  이 영역들은 이성적 추론에도 일익을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중요한 것은 배측 전전두엽(dorso-lateral prefrontal cortex: dlPFC)의 활동이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냉철한 이성적 추론은 주로 이 배측 전전두엽이라는 곳에서 이루어지는데 말이다. 
  웨스턴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열성 당원들도 마음의 수갑에서 풀려나는 순간(즉, 마지막 슬라이드를 보고 자신의 지지 후보에 대해 신뢰를 회복하는 순간)에 뇌에서 바로 이 도파민 반응이 약간 일어나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정말 사실이라고 하면, 극단적 열성 당원들이 왜 그토록 완고하고 폐쇄적인지, 나아가 우리 눈에는 괴상망측하고 편집증으로까지 비치는 믿음에 왜 그토록 목숨을 거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버튼 누르기를 멈추지 못하는 생쥐처럼, 열성 당원들은 그저 이상한 것들에 대한 믿음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믿고 싶지 않은 것에서 벗어나는 왜곡된 정신작용을 일으켜왔고, 그것이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뇌는 외부 반응에 강화된 상태이다. 극단적 당파심은 말 그대로 중독증일 수 있다.

>**합리주의자의 망상**
이성에 대한 신봉이야말로 서양 역사에서 가장 줄기차게 살아남은 망상이 아닐까 한다. 합리주의자의 망상이란 이성적인 추론 능력을 인간의 가장 고귀한 속성으로 보는 생각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이성적 추론을 통해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으며(플라톤의 관점), 아니면 신이 존재한다는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신무신론파의 관점). 그런데 합리주의자의 망상은 단순히 인간의 본성에 관해서만 주장하고 있지 않다. **거기에는 이성적 능력을 갖춘 계급(철학자 혹은 과학자)이 더 많은 권력을 지녀야 한다는 주장도 담겨 있는 것이다.**
  플라톤에서 칸트, 그리고 콜버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합리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선한 행동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 원인으로서 이성적으로 훌륭한 추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성적 추론 능력은 도덕적 진실에 이르는 왕도이며, 이성적 추론을 훌륭히 할 줄 아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행동할 확률도 높다고 합리주의자들은 믿는다.
  만일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다른 누구보다 덕 있는 사람은 아마 도덕철학자들이어야 할 것이다(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 윤리적 원칙을 이성으로 따져보는 사람들이니까). 과연 그러할까? 이를 확인해보기 위해 철학자 에릭 슈비츠게벨(Eric Schwitzgebel)이 설문 조사는 물론 여러 가지 염탐 방법을 통원해, 도덕 철학자들이 얼마나 자주 자선을 베풀고, 투표에 참가하고, 어머니에게 전화하고, 헌혈하고, 장기 기증을 하고, 컨퍼런스를 마친 후 자기 손으로 뒷정리를 하고, 학생들이 보낸 이메일에 얼마나 많이 답장해주는지 조사해보았다. 조사 결과, **도덕철학자들이 다른 분야의 철학자나 교수에 비해 나았던 항목은 단 하나도 없었다.**
  우리 안에 확증 편향이 그토록 강하고 뿌리 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니 학생들에게 다른 면을 보라고 가르치는 것이, 또 자기 의견과 반대되는 증거를 살피라고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확증 편향은 버그처럼 (플라톤이 지향한 이상적인 마음에서) 간단히 제거되는게 아니라 (논쟁에 나서기 좋아하는 우리 마음에) 본래부터 자리 잡고 있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성적 추론은 접어두고 직감만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소비자 선택이나 대인 관계 판단에서는 때로 직감이 더 나은 안내자이기는 해도, 공공 정책, 과학, 법에서는 직감을 기초로 삼았다간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그보다 개개인이 가진 이성적 추론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개인이 가진 능력을 우리는 제한적인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뉴런처럼 말이다. 뉴런은 오직 한 가지 일(즉, 수상돌기로 들어오는 자극을 재빨리 파악해 축색돌기에 펄스를 보낼지 '결정하는 일')에만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 따라서 뉴런은 그 자체로는 그다지 똑똑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뉴런을 모아 적재적소에 배치하면 다름 아닌 뇌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뉴런이 모이면 그것이 하나만 있을 때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훨씬 똑똑하고 융통성 있고 창발적인(emergent : 하위 계층에는 없는 특성이나 행동이 상위 계층에서 자발적으로 돌연히 출현하는 현상 - 옮긴이) 체계가 생겨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이성적 추론 능력을 가진 개인도 한 가지에서만큼은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입장(보통 직관적인 이유로 갖게 되는 입장)을 갖게 되면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를 잘도 찾아낸다는 것이다. 개개인이 이성적 추론을 하는 과정에서 선하고 개방적이고 무엇보다 진실을 중시할 거라고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그러나 그런 개인을 모아 저마다 제자리를 찾아줄 수 있다면, 즉 일부가 추론 능력을 활용해 다른 사람의 주장을 꺽는다 해도 개개인 모두가 공동의 연대 혹은 공동의 운명을 느껴 서로가 적정선을 지키며 상호작용을 해나갈 수 있다면, 결국에 그 집단에서는 훌륭한 추론 능력이 사회 체계의 창발성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 찾기를 목표로 하거나(첩보기관이나 과학계) 훌륭한 공공 정책을 입안해야 하는(입법부나 자문위원회) 집단 혹은 기관에서 지식과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들의 행동을 더 윤리적으로 만들고 싶을 때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 방법은 코끼리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이는 시간도 오래 걸릴뿐 아니라 이루기도 쉽지 않다. 두 번째 방법은 칩 히스(Chip Heath)와 댄 히스(Dan Heath)가 쓴 <<스위치(Switch)>>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오는 것으로, **코끼리와 기수가 어느덧 발을 들인 그 길, 즉 주변 환경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 2부 제2원칙: 바른 마음에는 다양한 힘이 있다 - 도덕성은 단순히 피해와 공평성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 5장 편협한 도덕성을 넘어
> 펜실베니아 대학 학생들은 내 연구에 속한 열두 집단 가운데서도 가장 별난 그룹에 속했다. 그들은 철두철미하게 '피해의 원칙'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인데, 이 원칙은 1859년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교양 있는 공동체에서 그 구성원에게 정당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하나, 타인에 대한 피해를 사전에 예방하려는 목적이 있을 때뿐이다."
  2010년 문화 심리학자 조 헨리히, 스티브 하인, 아라 노렌자얀 이 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별난 사람들?(The Weirdest People in the World?)>이라는 논문을 펴냈는데, 이들의 지적에 따르면, 심리학의 거의 모든 연구는 인류 전체 중에서도 아주 소수의 하위 집단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서양적이고 고학력이고 산업화되고 부유하고 민주주의적인(Western, Educated, Industrialized, Rich, Democratic : 여기서 WEIRD라는 준말이 나왔다) 문화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대상이라는 이야기이다.** WEIRD의 특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 세상이 관계보다는 별개의 사물로 가득차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인식에서는 특히 미국인들은 절대치를 맞추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 이들의 눈에는 선이 독립적 사물로 인식되고, 따라서 그것이 별개로 기억에 저장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동아시아인들은 상대치를 맞추는 과제에 미국인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 
  인식에 이런 식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고방식에도 차이가 나타난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전체적 사고를 하는 데 반해(전체 맥락 및 부분 간의 관계를 보는 사고방식), WEIRD권 사람들은 좀 더 분석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초점이 되는 대상을 해당 문맥에서 따로 떼어내 그것을 어떤 범주에 집어넣은 후, 그 범주에 적용되는 사실은 그 대상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보는 사고방식)
  비WEIRD권 사회에 살면서 관계, 맥락, 집단, 제도를 인식할 확률이 높은 사람의 경우에는 개인을 보호하는 일에만 그렇게 초점을 맞추지는 않을 것이다. **즉, 이때에는 좀 더 사회중심적인 도덕성을 가지게 되는데, 개인들의 요구보다 집단과 기관의 요구를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도덕적 관심사가 피해와 공평성의 원칙만 바탕으로 해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피해와 공평성 말고도 사람들이 염두에 두는 도덕적 관심사가 더 있을 것은 물론, 이런 사회는 사람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도덕적 덕목도 추가로 필요로 할 것이다.


> **윤리의 세 가지 모습**
시카고 대학은 <<플레이보이>>지에서 "파티 제일 못하는 학교"로 뽑힌 것을 자랑처럼 여기는 곳이다. 이곳은 겨울이 찾아오면 오랫동안 살벌한 추위가 이어지는 데다 술집보다 서점이 더 많고, 학생들이 입고 다니는 티셔츠에는 시카고대학의 문장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재미가 왔다 사망해버리는 곳"
  리처드 슈웨더가 몸담고 있던 문화는 그런 식이었다. 당시 슈웨더는 문화심리학 분야의 선구적 사상가로 꼽혔다. 문화심리학은 그 무렵 새롭게 탄생한 분과로, 맥락과 변동성을 사랑하는 인류학자의 태도에 정신 작동 과정을 흥미로워하는 심리학자의 관심을 접목시킨 것이었다. 이러한 문화심리학에서는 "문화와 정신은 서로가 서로를 구성한다"라는 사실을 금과옥조로 여긴다.**
  그중에서도 슈웨더가 오리사에서 연구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발전시킨 새로운 도덕성 이론은 도덕의 주제가 크게 세 가지 군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각각 자율성의 윤리, 공동체의 윤리, 신성함의 윤리로 각 윤리는 개개인이 무엇을 진정 중요한 것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자율성의 윤리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욕구, 필요, 애호를 지닌 자율적 개인이라는 점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리고 그런 욕구, 필요, 애호를 자신이 적절하다고 여기는 방식에 따라 자유롭게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는 **인권, 자유, 정의 같은 도덕 개념이 발달하는데, 그래야 사람들이 서로의 계획에 큰 타격을 주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윤리가 바로 이 자율성의 윤리이다. 자율성의 윤리는 존 스튜어트 밀이나 피터 싱어(Peter Singer) 같은 공리주의자들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칸트나 콜버그 같은 의무론자들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서양의 일상적인 사회를 걸어 나와 보면, 사람들이 쓰는 도덕적 언어에는 두 가지가 더 있음을 알게 된다. 그중 하나가 **공동체의 윤리**인데 여기에 바탕이 되는 생각은, 사람이란 가족, 팀, 군대, 회사, 부족, 나라 등 자신보다 더 큰 체의 구성원이라는 점이다. 자신보다 큰 이 실체들은 그것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총합을 넘어선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존재하는 것이자 진정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들을 반드시 지켜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실체 내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에게 할당된 역할을 수행해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세상에 의무, 위계질서, 공경, 명성, 애국심 등의 도덕적 개념이 발달한 사회가 많은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서양에서처럼 자기 삶을 스스로 설계해야 한다거나 자기만의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고 고집하면 이기적이고 위험한 사람으로 비친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분명 탄탄히 짜인 사회 망을 느슨하게 만들어 모든 사람이 의지하고 있는 사회제도와 공동의 실체를 허물어뜨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신성함의 윤리**에 바탕이 되는 생각은, 몸은 그릇이요 그 안에는 신성한 영혼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을 단순히 의식을 좀 더 갖춘 동물로만 여기지 않는다. 인간의 신의 아들이며, 따라서 그에 맞는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몸은 놀이터가 아니라 신전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남자가 생닭을 가져다 성행위를 할 경우, 설령 그 일이 어떤 피해를 끼치지 않고 그 누구의 인권도 침해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신의 질을 떨어뜨리는 일이자 창조주를 욕되게 하는 일이며, 우주의 신성한 질서를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슈웨더의 이론을 가져다(내가 "이유를 말해줄 수 있어요?"라고 물었을 때) 사람들이 내놨던 정당화 근거들을 분석해보았다. 이론은 기막히게 들어 맞았다. 펜실베니아 대학 학생들은 거의 자율성의 윤리만을 도덕성의 언어로 삼아 이야기한 반면, 다른 집단(특히 노동자 계층 집단) 사람들은 공동체의 윤리를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하고 있었고, 신성함의 윤리도 좀 더 이용하고 있었다.

> **인도에서 발견한 새로운 도덕**
한마디로 내가 발을 담근 사회는 성별 분리주의를 지향하고 위계질서의 층이 엄격한 데다 사람들이 종교에 헌신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런 곳을 나는 어떻게든 사회 자체의 틀로만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스스로가 거기에 동화되지는 못한 채 말이다. 
  나는 인도에서 나를 후원해주고 도와주고 가르쳐주는 그 사람들이 좋았다. 그곳에서는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나를 호의로 대해주었다. **그렇게 누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느끼다 보면, 그들의 관점을 취하기가 한결 쉬워지는 법이다. 내 안의 코끼리가 그들에게로 몸을 틀자, 이제는 기수가 그들을 변호할 양으로 갖가지 도덕적 논변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남자들을 성차별주의자에 압제자로 보던 생각이나 여자, 아이, 하인을 무력한 희생양으로만 보던 생각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보다 **이곳의 도덕적 세계에서는 개인보다 가족이 사회의 기본단위가 된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더불어 이곳 사람들은 한 무리의 큰 가족(하인도 포함하여)에 속한 채 서로가 서로에게 무척이나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다. 
  공동체의 윤리가 무엇인지는 슈웨더의 책을 통해 머리로는 다 이해하고 있었지만, 난생처음 그것을 몸으로 실감한 것이 인도에서였다. **사회구성원의 의무를 강조하고, 노인을 공경하고, 집단에 봉사하며, 자신의 욕구를 부정하는 도덕적 규약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가 궁금했던 것은, 똑같이 도덕성을 위반하는 행동인데도 왜 어떤 것은 구토감을 불러일으키고(가까운 사람에 대한 배신이나 아동학대) 다른 것은 구토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은행 강도나 세금 탈루) 하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 셋이 세웠던 이론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공간에는 일종의 수직적 계열이 존재하는데, 인간의 마음은 이것을 자동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수직적 계열이란, 맨 꼭대기의 신부터(도덕적으로 완벽한 존재) 시작해 천사, 인간, 인간 이외의 동물, 괴물, 귀신으로 내려가 맨 밑바닥에는 악마(완전한 악)가 자리한 것을 말한다.** 물론 이 안에 어떤 종류의 초자연적 존재가 들어가는가는 문화마다 다르고, 모든 문화에 이런 수직적 계열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높음=훌륭함=순수함=신', '낮음=열등함=더러움=동물'이라는 생각은 세계 곳곳에서 아주 널리 발견되는 게 사실이다. 오히려 너무도 널리 발견되어서 이런 생각이 일종의 원형(심리학자 융의 용어를 좋아한다면)이나 인간 안에 선천적으로 구비된 관념(진화심리학의 언어를 더 선호한다면)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이다. 
  우리 생각에 도덕적 구토감은 언제든 느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즉, 누군가 수직적 계열에서 낮은 단계의 행동을 했을 때 그 이야기를 보거나 듣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물론 이 신성함의 윤리에도 어두운 면은 있었다. 자신의 비위에 거슬린다는 느낌만을 바탕으로 신의 뜻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간, 다수에게 약간의 모멸감을 일으킬 수 있는 소수 계층(이를테면 동성애자나 비만인)이 사회에서 심한 배척과 잔혹한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성함의 윤리는 더러 자비, 평등, 인간의 기본적 인권과 양립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신성함의 윤리는 우리에게 나름의 소중한 잣대가 되어 주는 것이, 통속적 사회가 지닌 추악한 면을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세상에 만연한 물질주의를 수많은 사람이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신성함의 윤리가 있으면 고상함과 비속함에 대한 빈약한 인식(즉, 무엇이 '높고' '낮은' 행동인지에 대한 감각)에도 명확한 틀이 생길 수 있다. 이를 이용하면 지나친 물질주의는 물론, 지각없이 성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도 경계할 수 있는 것이다. 


> **매트릭스 바깥으로 걸어 나오기**
만일 그때 내가 인도를 관광 목적으로 간 것이었다면, 석 달 동안 얼마든지 내 매트릭스 속에 들어가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따금 서양 관광객들을 만나 성차별주의, 빈곤, 압제 등 우리가 목격한 일들에 관해 이래저래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인도에 간 것은 문화심리학을 공부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곳의 또 다른 매트릭스 안에, 그것도 자율성의 윤리보다는 대체로 공동체의 윤리와 신성함의 윤리로 짜인 매트릭스 안에 나를 끼워 맞춰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고 나서 미국으로 돌아와 보니 사회적 보수주의자들이 그렇게 정신 나간 사람들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 이제 나는 예전에 갖고 있던 당파적 태도(일단 거부부터 하고 나중에는 그런 확증 속에서 질문을 던지는 태도)를 벗어던진 뒤였다. 표면적으로는 진보적 정책과 보수적 정책이 서로 심한 충돌을 일으켜도, 좋은 사회를 만들려는 진심 어린 비전은 이 둘에 모두 담겨 있다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당파심에 의한 분노에서 해방되자 홀가분한 것이 참 기분이 좋았다. 이제 내게는 새로운 도덕 매트릭스를 탐험할 여유가 생겼고, 그것들 하나하나도 나름의 지적 전통에 의해 지탱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1991년 슈웨더는 문화심리학이 가진 깨달음의 힘을 다음과 같은 글로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타인이 품은 신념이라도 우리에게 유용한 부분이 있다. 사물에 관한 그들의 신념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순간, 우리의 합리성 안에 잠자고 있던 여러 가능성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 우리는 난생처음, 아니 다시 한 번, 그런 신념들이 가진 힘을 몸소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똑같이 한 가지 '배경막'만 쳐있지는 않은 것이다. 애초 우리 안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만일 여러분이 자라난 사회가 WEIRD군에 속한다면, 여러분은 자율성의 윤리를 교육을 통해 너무도 잘 숙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여러분은, 당사자는 전혀 부당함을 못 느끼는 상황에서조차 거기에 압제와 불평등이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네 세월이 흐르면 여러분도 자신 안에 잠자고 있던 도덕적 직관을 발견하는 수가 있다. 이곳저곳 여행을 다녀보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보고, 아니면 그저 전통 사회에 대한 훌륭한 소설 한 편을 읽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고 나면 여러분은 어느새 자신이 권력, 성, 인간의 신체와 관련된 딜레마를 뭔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방식에 따라 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 6장 바른 마음이 지닌 여섯 가지 미각
> 슈웨더나 나나 "뭐든지 다 좋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모든 사회 혹은 모든 요리가 다 똑같이 훌륭할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는 도덕적 일원론(단 한 가지의 원칙을 기반으로 도덕의 전체 체계를 세우려는 노력)만큼은 경계하는 입장이다. 도덕적 일원론을 기초로 한 사회는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을 만족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도덕적 원칙을 무시는 통에 비인간적인 곳이 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도덕적 판단의 문제도 이와 똑같다. 왜 사람들이 여러 가지 도덕적 이슈를 놓고 이편저편으로 갈리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공통으로 물려받은 진화의 유산부터 살펴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각 문화의 역사도 면밀히 살펴봐야할 테고, 또 그 문화 속에서 개개인이 어린 시절 어떤 식으로 사회화를 거쳤는지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에게 피해를 안 주려고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는, 어떤 사람이 배드민턴보다 사냥을 더 좋아하는 이유나 아무리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라도 온종일을 가난한 사람을 돕는 데에만 쏟아붓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우리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도덕적 미각 수용체를 특정 개인이 내리는 구체적인 도덕적 판단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 **도덕학의 탄생**
  오늘날 비종교적인 사람들은 근대에 일어난 계몽주의 운동을 철천지원수 사이에 벌어진 싸움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성을 주무기로 든 과학이 한쪽에서고, 옛날의 미신을 방패삼은 종교가 그 반대쪽에 서서 서로 대결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이비드 흄 생전만 해도, 이 싸움은 삼자 간 대결이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도덕적 앎이 신의 계시에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한편이었지만, **도덕성이 인간 본성을 초월하여 존재하는가를 두고는 두 편으로 갈렸다. 한편에서는 도덕성은 진정한 합리성에 연원을 둔 것이기 때문에 이성적 추론으로 연역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도덕성은 언어나 미각처럼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관찰을 통해서만 연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흄은 이성적 추론의 한계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인간 본성을 들여다보지 않고 논리적 추론만으로 도덕적 진리에 다다르려고 하는 사람은 도덕적 진리가 신성한 경전 속에 써 있다고 믿는 신학자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그에게는 둘 모두 초월론자였던 것이다. 

>**공감 능력을 잃은 바른 마음**
자폐증에 보통 '스펙트럼' 장애라는 설명이 붙는 것도, 자폐증은 사람마다 더하고 덜한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스펙트럼의 가장 끝에 있는 자폐증 환자들의 경우에는 마음 자체를 볼 줄 모른다고 여겨진다. 보통 사람들이 타인의 의도나 욕구를 파악할 때 사용하는 사회적 인지 소프트웨어(social-congnitive software)를 이들은 갖고 있지 못하다.
  `인기 양식의 두 가지 차원 - 자폐증이 있는 사람들은 체계화 능력은 매우 높은 반면 공감 능력은 매우 낮은 경향이 있다. 도덕철학자로 중요하게 꼽히는 몇몇 인물도 스런 경향이 있었다.`
  공감 능력이란 "상대방이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가졌는지 알아내고 나아가 거기에 적절한 감정으로 반응하려는 힘"을 말한다. 한편 체계화 능력은 "체계 안에 들어 있는 변수를 분석해내려는 힘, 나아가 어떤 체계에서 행동이 나타날 때 그것을 지배하는 숨은 규칙을 분석해내려는 힘"을 말한다. 지도와 기기 사용 매뉴얼을 잘 읽어내고 기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내기를 좋아한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체계화 능력이 평균 이상인 사람일 것이다. 
  이 두 가지 특성을 종횡으로 교차시키면 2차원 공간이 얻어지는데, 유전자와 태아기의 인자가 특정 방식으로 조합될 경우 공감 능력은 지극히 낮고 체계화 능력은 지극히 높은 뇌가 만들어질 수 있는데, 이러한 뇌를 가진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자폐증이다. 즉, 아스페르거 증후군(고기능 자폐의 하위 형태) 

> **벤담과 공리주의자 식당**
벤담의 저작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꼽히는 것이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벤담은 모든 개혁, 모든 법률, 심지어 모든 인간 행위를 단 한 가지 원칙에 따라 다스리자고 제안한다. 바로 **공리주의 원칙**으로 말이다.
  벤담의 철학은 어디서도 보기 힘든 고도화의 체계화를 보여주었고, 배런코언의 말대로 체계화는 곧 강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체계화라도 거기에 공감이 배제되어 있으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다. <아스페르거 증후군, 그리고 제러미 벤담의 기벽 및 천재성(Asperger's Syndrome and the Eccentricity and Genius of Jeremy Bentham)>이라는 논문을 보면, 필립 루카스와 앤 시런이라는 두 연구자가 벤담의 사생활 관련 일화를 모아 그것을 아스페르거 증후군 진단 기준과 비교해보는 내용이 들어 있다. **공감 능력이 낮고 사회생활 관계가 비좁은 것을 비롯하여, 둘은 벤담의 성향이 아스페르거 증후군 진단 기준에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스스로를 은둔자라 칭했고, 타인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여기 관련된 또 하나의 기준으로 우리는 상상력 경함(특히 타인의 내면적 삶과 관련된)을 들 수 있다. 벤담은 인간의 다양하고 미묘한 동기를 간파할 줄 몰랐고, 사적인 행동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철학 속에서도 동시대 인물들을 상당수 공격했다. 존 스튜어트 밀(밀은 확실히 자폐증과는 거리가 먼 공리주의자이다)은 결국 벤담을 경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루카스와 시런이 내린 결론에 따르면, 오늘날까지 벤담이 살아 있었다면 아마도 그는 아스페르거 증후군을 진단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칸트와 의무론자 식당**
임마누엘 칸트는 1724년 프러시아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실제적 이유를 설명하는데에서 동정심 같은 여러 가지 감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그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리에 대한 그런 식의 설명에는 주관성이 함축된다는 것이 그에게는 마음에 걸렸다. 도덕적 감성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면, 도덕적 의무도 사람마다 달라지지 않겠는가? 더구나 한 문화 안에서 사람들이 모두 다른 감성을 가지고 있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도덕적 미각을 늘려라**
이론을 만든 사람들이 아스페르거 증후군을 앓았을지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공리주의나 칸트의 의무론을 잘못된 도덕 이론으로 치부할 생각은 없다. 
  진화의 개념 없이는 도덕성을 이해한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슈웨더에게서 수학할 때 **진화론적 설명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배운 터였다. 그것은 떄로 환원주의로 흐르거나(문화인류학자들이 초점으로 삼는 구성원 사이의 공통된 의미를 진화론적 설명에서는 무시하기 때문이다), 또는 소박한 기능주의로 흐를 수 있었다(모든 행동이 어떤 기능을 위해 진화했음을 너무 성급히 가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각각의 도덕성에 대해 신중한 진화론적 설명을 내놓아야 했고, 이러한 선천적 직관들이 어떻게 문화적 진화와 상호작용하는지, 나아가 거기서 어떻게 각양각색의 도덕 매트릭스가 만들어져 현재 우리가 사는 지구를 뒤덮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나는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다양한 덕의 목록부터 분석해나가기 시작했다. 덕이라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낸다. 전사 문화에 사느냐, 농경문화에 사느냐, 혹은 현대의 산업화 문화에 사느냐에 따라 아이들이 배우는 덕은 다르다. (...)그러나 호의, 공평성, 충성심 같은 덕목들이 대부분의 문화에 나타나는 양상을 살피다보면 어느새 우리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어쩌면 인간은 (미각 수용체와 유사한) 저차원의 사회적 수용체를 누구나 몇 개씩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으로 특정한 사회적 사건을 다른 사건보다 더 잘 알아채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나는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덕과 잘 정립된 진화 이론 사이에서 연관성을 찾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도덕성 기반 이론** 
  우리는 연구를 위해 인지인류학자 당 스페르베와 로런스 허슈펠드(Lawrence Hirschfeld)에게서 '모듈성(modularity)' 아이디어를 빌려왔다. 모듈이란 모든 동물이 뇌 속에 갖고 있는 조그만 스위치 같은 것이다. **이 모듈은 특정 생태적 지위에서 생존에 중요한 어떤 패턴이 나타나면 그 스위치가 켜지게 되어 있다. 그러한 패턴이 감지될 경우 모듈은 신호를 보내 (결국에는) 그 동물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보통은) 이 과정에서 적응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상당수 동물은 뱀을 생전 처음 보는 순간에도 두려움 반응을 보이는데**, 이는 뱀 감지 장치처럼 기능하는 뉴런 회로가 그들의 뇌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들어 있을 도덕적 '미각 수용체'의 모습을 완벽하게 설명해주었다. 사회생활 속에서 오랜 시간 위협과 기회를 접하며 거기에 적응한 결과가 아마 도덕적 미각 수용체일 것이다. 이것들로 인해 사람들은 특정 종류의 사건(잔혹한 행동이나 무례한 행동)에 관심을 돌리게 되고, 나아가 그것들이 순간의 직관적 반응, 어쩌면 특정 종류의 감정(동정심이나 분노)까지 일으키는 것일 터였다.
  이런 접근 법은 우리가 문화적 학습과 문화적 다양성을 설명하는 데에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스페르베와 허슈펠드에 따르면, 모듈을 자극하는 동인은 **본래적(original) 동인과 통용적(current) 동인 두 가지이다.** 본래적 동인은 모듈이 설계될 당시의 목표물을 가리킨다.(즉, 뱀 감지 모듈의 경우 뱀의 전체 집합이 본래적 동인이다). 한편 통용적 동인은 우연하게라도 모듈을 자극하게 되는 이 세상 모든 사물을 말한다.(따라서 실제 뱀을 비롯해 장난감 뱀, 구부러진 막대기, 두꺼운 밧줄 등). 모듈은 실수 없이 정확하지는 않아서, 다른 동물이 실수하는 점을 이용해 속임수를 발달시키는 동물도 많다. 예를 들면, 꽃등에 ~ 몸통에 노란색과 검은색의 줄무늬 발달 ~ 언뜻 보면 말벌과 비슷하다.
  
>**6장 요약**
- 의무론과 공리주의는 '한 가지 수용체'를 지닌 도덕으로, 이것이 무엇보다 강력히 와 닿는 사람들은 체계화 능력은 높고 공감 능력은 낮을 가능성이 크다.
- 바른 마음의 미각 수용체가 될 좋은 후보로는 배려, 공평성, 충성심, 권위, 고귀함의 다섯 가지가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론이 별로 값어치가 없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하나쯤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전이 일어나는 순간은 그런 이론들이 경험적 증거를 통해 검증되고, 뒷받침되고, 수정될 때이며, 특히 그 이론이 쓸모있다고 판명이 날 경우 발전은 더욱 의미 있어진다. 이를테면 같은 나라 사람들이 양편으로 갈려 서로 다른 도덕 세계에 사는 것처럼 상대편을 보다가 어떤 이론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면, 그 이론은 꽤 쓸모 있다고 할 수 있다. 

### 7장 정치는 도덕을 어떻게 이용하는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만들어진 것들**
  신경학자 게리 마커스(Gary Marcus)는 종전의 내장 설계도를 대신해 인간의 뇌는 한 권의 책과 같고, 엄마의 배 속에 있는 동안 유전자가 그 초고를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태어날 당시 책에는 어느 장도 완성되어 있지 않으며, 일부는 아예 개요만 대략 정해져 있어서 아동기를 거치며 그 내용을 채워야 한다. 그러나 각 장(성욕, 언어, 음식 취향, 도덕성에 관한 내용이라고 하자)은 또한 완전히 빈 여백은 아니어서 사회가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써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이 초고를 주면, 경험이 그것에 수정을 가한다. ...... '내장'이라는 말은 변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저 경험 이전에 구조화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 도덕성 기반 다섯 가지를 열거한 것도, 바른 마음이 "경험 이전에 어떤 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는지" 그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첫 번째 노력이었다. 도덕성 기반 이론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애초 우리가 받은 초고가 아동기 동안 어떻게 수정되는지, 또 거기서 어떻게 다양한 도덕성이 발생하여 여러 문화, 나아가 여러 정치적 입장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지 설명할  것이다.

>**배려와 피해**

>**공평성과 부정**

>**충성심과 배신**

>**권위와 전복**

>**고귀함과 추함**

### 8장 도덕적인 인간이 승리한다
> 예를 들어, 케리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한 대선 후보 수락 연설을 한번 살펴보자. 그는 부시행정부가 저지른 갖가지 실정을 열거하며 내용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슬로건을 외쳤다. 

>**도덕성을 측정하다**
우리는 도덕성 기반 설문지(Moral Foundations Questionnaire : MFQ)' 첫 번째 버전을 만들어냈고, 그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지시문을 달았다. "여러분이 무엇에 대해 옳고 그름의 결정을 내릴 때, 다음 항목의 내용은 얼마나 중요한 것으로 생각됩니까?" 우리는 이 지시문에 이어 0~5점까지의 응답 점수를 나열하고 거기에 설명을 붙였다.
  도덕성 기반과 개념적으로 관련된 단어를 수백 개 찾아냈다**(예를 들어, '평화, 배려, 동정심'은 배려 기반의 긍정적인 면에 속하고, '고통 받다, 잔혹한, 악랄한'은 배려 기반의 부정적인 면에 속한다. 또 '복종하다, 의무감, 명예'는 권위 기반의 긍정적인 면에 속하고, '반항하다, 홀대하다, 반발하다'는 권위 기반의 부정적인 면에 속한다. (...) 유니테리언 교회 목사들은(진보파) 배려와 공평성의 단어를 훨씬 더 많이 사용한 반면, 침례교 목사들(보수파)은 충성심, 권위, 고귀함의 단어를 훨씬 더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진보주의자들의 뇌는 배려와 공평성의 중요성을 거부하는 문장을 접할 때 보수주의자들의 뇌에 비해 더 많은 충격을 보였다.** 더불어 충성심, 권위, 고귀함의 중요성을 지지하는 문장을 접할 때에도 보수주의자보다 더 충격을 보이는 모습이었다(예를 들어, "10대 때에는 부모님 말씀에 의문을 품어야 한다"보다 "10대 때에는 부모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한다"에 더 충격을 보였다). 다시 말해, '진보' 혹은 '보수'의 라벨이 붙은 무엇을 고른다는 것은 단순히 설문지 위에서 서로 다른 가치를 고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진술을 접하고 0.5초도 안 되는 사이 당파적인 뇌는 벌써 자기들끼리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번쩍 일어나는 뉴런의 이 애초 활동이 바로 **코끼리이며, 코끼리가 조금이라도 몸을 트는 순간 기수는 다른 방식으로 추론을 전개해 다른 종류의 증거를 찾아내고, 그리하여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직관이 먼저이고, 추론은 그다음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왜 보수 정당에 투표하는가**
  어떻게 하면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평화롭게 살아갈 사회를 만드느냐 하는 문제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의 접근법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두 접근법 중 하나는 존 스튜어트 밀로 대표되고, 나머지 하나는 프랑스의 위대한 사회학자 에밀 뒤르캠(Emile Durkeim)으로 대표된다. 소론에서 나는 밀의 비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 번째로, 상호 이득을 위한 사회적 계약으로써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상상해보자, 이곳에서는 개인들이 다 같이 평등하게 지내며, (...) 이러한 계약 사회의 대표적 수호자는 존 스튜어트 밀로, 그는 <<자유론(On Liberty)>>에서 이렇게 썼다. "교양 있는 공동체에서 그 구성원에게 정당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하나, 타인에 대한 피해를 사전에 예방하려는 목적이 있을 때 뿐이다." 밀의 이 비전은 수많은 진보주의자와 자유주의자에게 호소력을 지닌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밀의 사회는 평화롭고 개방적이고 창의적인 곳으로서, 각양각색의 개인이 서로의 권리를 존중해준다. 그러면서도 궁지에 처한 사람들 돕거나 공익을 위해 법을 바꾸어야 할 때는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하나로 뭉친다`
  이런 식의 사회 비전은 오로지 **배려 기반과 공평성 기반에만 의존하고 있음을 나는 소론을 통해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누구나 이 두 기반에 의지한다고 가정하게 되면, 우리는 사람들이 잔혹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며, 나아가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는 일에는 발 벗고 나서리라고 가정하게 된다. 이어 나는 뒤르켐의 비전을 대조해 보여주었다.
`이제는 사회가 개인 간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다기보다 사람들이 함께 살 방편을 찾는 과정에서 차차 유기적으로 만들어진다고 상상해보자. 즉, 생존을 위해 하나로 엮인 사람들은 상대방의 이기심은 서로 억누르는 한편, 사회 이탈자나 무임승차자 등 집단의 협동에 해가 되는 무리를 처단해나간다. 이때 사회의 기본 구성단위는 개인이 아니다. 그 기본단위는 위계질서가 잡힌 가족으로, 여타 기관들도 이를 본으로 삼는다. 이런 사회 속에서는 개인들이 태어나는 순간 강력하고 제약적인 인간관계 속으로 들어가는바, 따라서 자율성에도 심대한 제약이 따른다. 이렇듯 좀 더 구속적인 사회 개념을 수호해온 사람은 사회학자 에밀뒤르켐으로, 일찍이 아노미(무규범 상태) 현상을 경고한 그는 1897년에 이렇게 썼다. "인간은 자신이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자기보다 높은 무엇이 보이지 않으면 고차원의 목표에 애착을 가지거나 규칙에 순응하지 못한다. 사회의 모든 압력에서 자유롭게 해방된다는 것은 곧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자 든든한 기반을 잃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뒤르켐의 사회는 숱한 집단이 서로 포개지고 겹치며 일종의 안전망을 이루어, 개개인을 사회화시키고 탈바꿈시키고 돌보는 것이다. 자기 뜻대로 하게 개인을 내버려두면 그는 결국 피상적이고 육체적이고 이기적인 쾌락을 좇게 되기 때문이다. 뒤르켐의 사회가 더 중요시하는 것은 자기표현보다는 자기 절제, 권리보다는 의무, 타 집단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기 집단에 대한 충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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